한국 여자골프에 이정표가 하나 더 생겼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한국(계) 선수 200승 달성이다. 1988년 3월 구옥희 프로(2013년 작고)가 미국 스탠더드레지스터 대회에서 한국 여자골프 사상 첫 우승컵을 들어올린 지 꼭 30년 만이다. 최나연(31)이 2011년 10월 말레이시아 사임다비클래식에서 100승 주인공이 된 이후 7년 만에 다시 100승을 추가했다.

롱퍼터 쓰는 K골퍼 첫 챔프 등극

‘K골프’ 200승 고지에 첫발을 내디딘 주인공은 미국 동포 애니 박(23·박보선)이다. 애니 박은 11일(한국시간) 미국 뉴저지주 갤러웨이의 스톡턴시뷰호텔&GC(파71·6217야드)에서 끝난 LPGA투어 숍라이트클래식(총상금 175만달러)을 최종합계 16언더파 197타로 제패했다. 마지막날 그는 이글 1개를 곁들인 8언더파를 몰아쳐 2위 요코미네 사쿠라(일본)를 1타 차로 제쳤다. 우승 상금은 26만2500달러(약 2억8000만원).

미국 뉴욕에서 한국인 부모 사이에 태어난 애니 박은 서던캘리포니아대에 다닐 때인 2013년 미국대학선수권(NCAA) 개인전 우승을 차지한 골프 기대주였다. 2015년 2부 투어인 시메트라투어에서 3승을 거둔 뒤 2016년부터 LPGA투어에서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특별한 성적이 없어 주목받지 못했다. 지난해에는 허리 부상까지 겹쳐 2부 투어를 주로 뛰다 기회가 생길 때마다 월요예선 등을 통해 LPGA투어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결국 47번째 대회 만에 자신의 생애 첫 승을 따냈다. 지금까지 가장 좋은 성적이 2016년 이 대회에서 기록한 공동 6위였다. 애니 박은 단독 선두였던 김세영에 4타 뒤진 채 최종일에 나서 자신의 생애 첫 승을 역전승으로 장식하며 무명의 설움을 털어냈다.

애니 박은 여자 선수로는 드물게 시니어골프 황제인 베른하르트 랑어(독일)처럼 롱퍼터(브룸스틱)를 쓴다. 이번 대회 마지막날도 이 롱퍼터가 불을 뿜었다. 9번홀 15m가 넘는 이글을 잡아낸 것을 포함해 13번홀과 14번홀에서도 모두 10m가 넘는 긴 퍼트를 홀에 꽂아 넣어 우승까지 내달았다. 한국(계) 여자 선수 중 롱퍼터를 쓴 이는 한때 박희영과 미셸 위(위성미) 등이 실험적으로 시도해본 정도다. 롱퍼터로 LPGA에서 우승까지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롱퍼터는 애덤 스콧(호주), 랑어 등 여러 선수가 애용했지만 그립 끝을 몸통에 고정해선 안 된다는 ‘앵커링(anchoring) 금지’ 규정이 생기면서 기피 퍼터로 전락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가슴에 그립 끝을 대지 않고 살짝 떼는 방식으로 여러 선수가 다시 롱퍼터를 사용하고 있다. 애니 박은 우승한 뒤 “퍼팅이 너무 잘됐다. 공이 본 대로 굴러가더니 모두 홀 속으로 들어갔다. 힘겨운 시간을 보냈지만 응원해준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기에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다”며 눈물을 쏟았다.

구옥희 프로가 뿌린 씨앗 ‘K골프’

구옥희부터 애니 박까지… K골프, 30년 만에 LPGA 200승 '터치'
애니 박은 1988년 구옥희 프로 이후 LPGA 퀸에 오른 58번째 K골퍼다. 한국계 동포 챔프로는 리디아 고(고보경), 미셸 위와 대니엘 강(강효림), 노무라 하루(문민경) 등에 이어 7번째. K골퍼 전체가 30년간 합작한 200승 중 박세리가 25승으로 가장 많이 기여했고 그 뒤를 박인비(19승)가 뒤쫓고 있다.

한국 여자골프의 씨앗을 뿌린 구 프로는 경기 고양시에 있는 123골프장에서 캐디를 하다 골프에 입문해 1978년 프로골퍼가 됐다. 이후 국내에서 20승, 일본에서 23승을 올렸고 미국과 일본 투어를 병행하던 1988년 LPGA투어 한국인 첫 승을 따냈다. 1956년생인 구 프로는 2013년 일본에서 골프행사를 하던 중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구 프로의 첫 승은 1998년 박세리가 LPGA에서 첫 승(US여자오픈)을 따내기 전까지 묻혀 있었다. 강춘자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수석부회장은 “1988 서울올림픽 분위기로 달아오르던 때인 데다 여자골프에 대한 인식이 낮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며 “200승을 놓고 한국계 동포를 포함해야 하느냐는 논란이 있을 정도로 관심이 큰 지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