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 한국화 실험을 통해 ‘현대판 수묵화’ 장르를 개척한 김춘옥 화백(73·사진)의 말이다. 오는 19일 서울 퇴계로 세종갤러리에서 시작하는 김 화백의 개인전(7월1일까지)은 한국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기운차게 보여주는 자리다. 전시회 주제는 ‘유현(幽玄)의 앙상블’. 한지를 여러 겹 쌓아 올린 화면에 먹과 색을 칠한 다음, 다시 손으로 뜯어내는 방식으로 꽃 숲 나무 등을 묘사한 근작 30여 점을 내보인다.
서울대 미대 한국화과를 나온 김 화백은 ‘자연-관계성’이라는 묵직한 철학적 주제를 갖고 서양 미술에서 주로 쓰이는 콜라주와 데콜라주라는 기법을 전통 한국화에 접목해 왔다. 다양한 자연의 형상을 표현한 그의 작품은 전통성에 바탕을 두되 한국화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접근방법으로 세계화를 함께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전업미술가협회 이사장, 한국화여성작가회장, 한국미술협회 수석부이사장을 차례로 지낸 그는 한국화의 이런 실험성을 인정받아 옥관문화훈장(2003년)과 한국미술문화상(2007년)을 받았다. 2010년부터 작년 초까지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는 ‘마을미술 프로젝트’ 추진위원장을 맡아 전국 96개의 낡고 퇴락한 마을에 예술로 새 옷을 입히는 미술 대중화에 앞장섰다.

그는 이런 관계의 유현미를 살려내기 위해 먼저 한지를 5~8겹가량 차례로 발라 올린다. 경우에 따라 색지를 배접하기도 한다. 종이가 마른 뒤에는 수묵을 밝은색에서 어두운색의 순서로 풀어놓는다. 마지막으로 화면에 올라가는 색깔은 다층적 명암의 세계가 묻어 있는 검은색이다. 화면은 배어들었던 농담이 저마다 형상을 이루며 입체적으로 살아 움직인다.
“1m 크기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 종이를 뜯어내고 메우고 하는 수만 번의 손놀림이 필요합니다. 30년 작업했더니 지금은 손금이 아예 없어졌어요.”
김 화백은 최근 서양화에 밀려 한국화가 크게 위축된 현실과 관련해 “살아남는 게 나아가는 시대”라고 함축적으로 요약했다. 관람객이 선택하는 게 반드시 옳다고 할 수 없고, 옳은 것이 반드시 살아남는 건 아니라고 전제한 뒤 디지털 시대에도 우리 것을 챙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감자가 원래 나라 밖에서 들어왔지만 지금은 식재료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듯이 한국화도 외부적 요소를 흡수해 익숙해지다 보면 내 것이 돼 스스로 풍부해진다는 얘기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