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원상회복
얼마 전 오랜만에 버스를 타고 출근했다. 버스 안은 조용하고 쾌적했다. 승객들 표정에 새롭게 눈길이 갔고 차창 너머 가로수와 하늘도 평소보다 상쾌하게 느껴졌다. 버스 안 시계 초침은 승용차 안 시계 초침보다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승용차로 출퇴근하면서 느끼지 못했던 평화로움을 느꼈다. 새삼스럽게 매일 마주치는 일상적인 대상들도 시각(視角)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문득 몇 해 전 봄에 걸어서 출퇴근하던 일이 생각났다. 그해 봄 매일 50여 분 천변(川邊)을 걸어 출퇴근하면서 바쁜 업무에 지친 심신을 회복할 수 있었다. 길가의 꽃과 나무를 바라보며 걷는 것이 즐거워 행복한 마음으로 퇴근시간을 기다리곤 했다.

현대사회는 더 빨리, 더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것을 기본 덕목으로 삼는다. 경쟁과 승부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시간에 쫓기고 있다. 일에서뿐 아니라 여가생활에도 한가함과 여유로움의 공간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사물의 본성과 아름다움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대상과의 교감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시간의 흐름을 관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태주 시인의 관찰처럼 들판의 ‘풀꽃’ 하나도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인간은 단순히 오락이나 유희를 통해서는 진정한 행복이나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없다. 파스칼은 사람들이 권태를 피하기 위해 열정의 대상을 스스로 만들고 이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계속 자극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는 고요한 순간에 절대적 존재나 자연과 교감함으로써 찾을 수 있는 영혼의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히말라야 인근 국가 부탄의 주민과 미국 뉴욕 노숙자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차이가 없지만 행복지수는 하늘과 땅 차이다. 그 이유는 바로 부탄 주민들 삶이 자연과의 일치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가 이룩한 다양한 문명의 혜택을 외면하거나 생존경쟁의 세계에서 마냥 초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은 자연으로부터 왔으며 그 본성은 자연에 닿아 있다. 우리가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서는 자연과의 친교를 통해 원래의 본성을 회복하는 ‘삶의 원상회복’이 필요하다.

“마음의 노래란 휜 가지 끝에 내린 이슬 한 방울이 떨리면서 시작되는 것, 그것이 차츰 커지고 깊어져 마침내는 우리 안에서 이름할 수 없는 분의 목소리로 변화하는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세상이 소란을 피워 우리로 하여금 귀가 먹게 하고 멍청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자기 존재의 원리로 되돌아올 것입니다.”(자끄 러끌레르끄의 《게으름의 찬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