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박2일 일정으로 19일 중국 베이징을 찾았다. 지난 3월 말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처음 정상회담을 한 그는 90여 일 만에 세 번째로 북·중 정상회담을 했다. 2012년 권력을 승계한 김정은은 올 3월 말 6년 만에 처음 중국을 방문했다.

석 달 사이 세 번이나 정상회담을 한 것은 북·중 관계가 ‘혈맹’으로 불릴 정도로 돈독하던 김일성 시대나 집권하는 동안 아홉 차례 중국을 찾은 김정일 시대에도 없던 일이다. 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이 열린 지 1주일 만에 이뤄진 북·중 정상의 만남이 북한 비핵화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美·中과 ‘밀당’하는 김정은

김정은의 방중은 시 주석과 미·북 정상회담 결과를 공유하면서 미국과의 비핵화 후속 협상을 앞두고 중국과 협력 방안을 조율하려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조만간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북한을 방문해 후속 협상을 벌일 예정인 만큼 북·중 간 공조체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중국을 지렛대로 활용해 대(對)미국 협상력을 높이려는 전략이라는 분석이다.

김정은은 이날 오후 5시께 인민대회당에서 시 주석과 정상회담을 했다. 북한 측에선 최용해 국무위원회 부위원장과 박봉주 내각 총리,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이수용 노동당 부위원장 겸 국제부장, 이용호 외무상, 노광철 인민무력상 등이 배석했다. 중국 측에선 왕후닝 정치국 상무위원과 딩쉐샹 당 중앙사무처장, 양제츠 외교담당 정치국위원, 왕이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 장관이 참석했다.

관영 CCTV에 따르면 시 주석은 “국제 정세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중·북 관계를 발전시키고 공고히 하려는 중국의 확고한 입장과 북한에 대한 지지에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북·미 양국이 정상회담 성과를 잘 실천하고 관련 각국이 협력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함께 추진하길 바란다”며 “중국은 계속 건설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정은은 “북·미가 정상회담에서 달성한 공동 인식을 한 걸음씩 착실히 이행한다면 한반도 비핵화는 새로운 중대 국면을 열어나갈 수 있다”며 “북한은 중국이 한반도 비핵화 추진, 한반도 평화 및 안정 수호에서 보여준 역할에 감사하고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수행단 총출동

김정은은 오전 9시20분께 안토노프(AN)-148 기종인 고려항공 251편 특별기를 타고 베이징 서우두공항에 도착했다. 김정은이 베이징에 비행기를 타고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공항엔 김정은이 도착하기 한 시간 전에 고려항공 소속 일류신 76 화물기가 먼저 착륙했다. 김정은의 전용차인 번호판 없는 벤츠 차량 등을 실어온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전용차를 상징하는 휘장이 새겨진 VIP 차량도 두 대 목격됐다. VIP 차량을 보좌하는 고급 승용차 10여 대와 미니버스 10여 대, 구급 차량, 식자재를 실은 차량이 뒤를 따랐다.

김정은은 공항에 도착한 뒤 곧바로 톈안먼을 거쳐 영빈관인 댜오위타이로 갔다. 이후 두문불출하다 오후 4시50분 인민대회당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정상회담에 앞서 시 주석과 부인 펑리위안이 김정은과 부인 이설주를 맞았다.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김정은은 시 주석과 함께 중국군 3군 의장대를 사열했다. 회담이 끝난 뒤엔 환영 만찬이 이어졌고 만찬 공연도 함께 관람했다.

김정은은 20일 지린성 창춘(長春)으로 이동해 북·중 간 경제 협력을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 소식통은 “김정은이 창춘을 방문해 현장을 둘러보는 형식으로 북·중 협력을 논의한 뒤 평양으로 돌아간다는 정보가 있다”고 전했다.

◆김정은, 제재 완화·경협 모색

베이징 소식통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시 주석의 방북 시기도 논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또 시 주석이 김정은에게 중국이 그동안 주장해온 한반도 문제 해법도 다시 강조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쌍중단’(북한 핵·미사일 도발과 한·미 연합군사훈련 중단)이 성사 단계에 들어선 만큼 앞으로는 ‘쌍궤병행’(한반도 비핵화 프로세스와 미·북 평화협정 협상)에 주력하라고 조언했을 것이란 지적이다.

김정은은 시 주석에게 유엔 등에서 대북 제재 완화를 공식 거론해줄 것을 요청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다. 김정은은 미·북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체제 안전 보장과 한·미 군사훈련 중단 등을 끌어냈지만 경제 제재 완화는 약속받지 못했다. 미국은 ‘비핵화가 일정한 수준에 이르기 전까지는 제재를 풀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김정은의 이번 방중엔 미국과 중국을 경쟁시켜 최대한 이득을 취하려는 전략이 숨어 있다는 분석이 많다. 뉴욕타임스는 “미·중 통상전쟁이 격화되는 상황을 이용해 김정은이 양국의 경쟁을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반도 정세 변화로 정치·외교적 그리고 경제적으로 몸값이 높아진 김정은으로선 미국과 중국이 경쟁하며 견제할수록 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다.

중국 관영 매체들이 김정은의 방중 한 시간 만에 이례적으로 관련 소식을 보도한 것도 미국을 겨냥한 것이란 해석이 많다. CCTV는 이날 김정은의 방중을 거의 실시간으로 전했다. 북한 지도자가 북한으로 돌아가기 전 방중 사실이 보도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과 한층 가까워진 관계를 과시함으로써 미국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베이징=강동균 특파원 kd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