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을 시작한 게 후회스럽습니다.”

[현장에서] '2차 가해' 무방비로 노출된 '미투' 민사소송
서울 번화가의 한 모텔에서 일어난 강간 사건이었다. 피해자 A씨는 형사재판에서 유죄가 선고된 가해자 B씨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민사소송을 시작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B씨 가족이 직장으로 들이닥쳤다. 한 번만 봐달라고 읍소하더니 결국 돈만 밝히는 ‘꽃뱀’이라며 난동까지 피웠다. 직장 동료들에게 피해 사실이 알려진 A씨는 ‘차라리 소송을 하지 말걸’ 하는 후회가 밀려든다고 했다.

‘2차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선 개인정보 보호가 필수다. 소송에서 지면 보복 범죄를 저지르는 일도 다반사여서다. 다행히 2016년 형사소송법이 개정돼 판결문 등 재판 기록에서 개인정보가 드러나지 않도록 조치됐다. 검찰 진술서 작성 때부터 피해자 이름은 가명으로 처리된다.

하지만 형사와 달리 민사소송에서 피해자는 여전히 보호 사각지대에 놓인다. 법원에 소장을 제출하면 소장 부본이 피고에게 송달될 때 실명과 주소가 그대로 넘어간다. 소송이 끝난 뒤 소송 비용 분담을 확정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피해자가 승소해 강제집행을 하는 단계에선 주민등록번호까지 공개된다.

이는 ‘2차 가해’를 부를 수밖에 없다. 가해자가 직접 사죄하겠다는 핑계를 대며 집 앞에서 기다리기도 한다. 신고와 재판까지 수도 없이 용기를 내야 했던 피해자들은 또다시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 이사나 개명까지 고려하는 경우도 많다.

물론 가해자로선 원고의 신상이 궁금한 것이 인지상정이다. 개인 간의 법적 다툼에서 한쪽에만 특혜를 줘선 안 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피해자에 대한 마땅한 보호는 특혜와 명확히 구분돼야 한다.

연초 활발했던 ‘미투’ 운동의 공이 속속 법원으로 넘어오고 있다. 형사재판이 끝나면 민사소송이 우후죽순 이어질 것이다. 상처를 추스르기도 바쁜 피해자들이 ‘꽃뱀’으로 비난받고 보복 범죄까지 신경 써야 하는 현실은 야만적이다. 법과 제도부터 피해자들을 향해 ‘위드유(with you·당신과 함께)’를 외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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