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 국무총리가 지난 23일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낙연 국무총리가 지난 23일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명백한 보수진영 원로다. 하지만 그의 발자취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위시한 동교동계에까지 뻗어 있다. ‘DJP 연합’을 통해 김대중 정부 출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보수진영에 몸담고 있지만 어떤 정치 세력과도 연대하고 합할 수 있다는 ‘연정’의 사례를 처음으로 보여줬다.

◆보수, 썩지 않으려면 새 물이 들어와야

1964 국교 정상화 위해 訪日
1964 국교 정상화 위해 訪日
김 전 총리는 유언집 《남아있는 그대들에게》에서 보수의 가치를 역설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대개 보수의 입장에 서 왔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추구해 왔다”며 “이념적으로 보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전통을 가지고 지신(知新·새로운 것을 알다)하는 태도를 취하다 보니 ‘개혁적 보수’라는 말(평가)이 나왔다”고 말했다. 이 책은 김 전 총리가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인생을 세상에 전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 약 2년 전부터 그간의 기록을 다듬고 주요 내용을 구술받아 정리하는 방식으로 제작됐다.

1968 ‘자의반 타의반’ 야인시절
1968 ‘자의반 타의반’ 야인시절
김 전 총리가 곱씹어본 한국 현대사의 질곡은 전국 단위 선거에서 연거푸 패한 자유한국당에 시사점을 남기고 있다. 한국당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후 밑바닥부터 당원과 지지층의 이탈이 계속됐는데도 보수 개혁을 게을리한 결과라는 방증이다. 박 전 대통령의 탄핵을 지켜보면서는 “정치는 단념의 기술”이라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1972 총리시절 국회 답변
1972 총리시절 국회 답변
그는 한국당이 처하게 될 파국을 예견이나 한 듯 “보수가 늘 보수 그대로 있으면 고인 연못처럼 썩어버린다”며 “연못이 썩지 않으려면 늘 새 물이 들어오고 오래된 물이 흘러나가면서 서서히 연못의 물이 바뀌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지금이야말로 과거에서 배울 때

1979 박정희·박근혜 부녀와 함께
1979 박정희·박근혜 부녀와 함께
김 전 총리는 “박정희·전두환 정권도, 저도 모두 공이 있고 과오가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전두환 정권은 서울올림픽을 유치하고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하는 성과를 냈다”고 말했다. 물론 “군사반란과 5·18 광주 탄압, 수천억원 부정축재라는 여러 잘못이 있다”고 전제했다.

김 전 총리는 “어제는 어제의 논리대로 최선을 다했고 그것이 바탕이 돼 오늘이 이뤄진 것”이라며 “과거는 그대로 존재할 때 의미가 있다. (후손들은) 과거를 그대로 두고 공과 과오 모두 받아들여 전승(계승)하든 배척하든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군사정변을 기획해 박정희 정부를 탄생시킨 것에 대해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우리나라 역사에서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말로 갈음했다.

1987 피아노 치는 JP
1987 피아노 치는 JP
그는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초심을 품고 과거 정치인들로부터 다시금 지혜를 배울 때”라고 지적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의 과오로부터 냉철함을 배우고, 해리 트루먼에게서 시대의 지도자상을 깨닫고, 존 F 케네디에게서 불꽃 같은 열정을 본받고, 윈스턴 처칠의 위대한 봉사의 의미를 새기며, 샤를 드골에게서 애국의 길을 들여다보라는 언급도 했다.

박근혜 정권 몰락을 가져온 촛불집회에서도 배울 점이 있다고 했다. 그는 “이제는 양식 있는 1000만 명이 필요한 시대”라며 “촛불과 태극기 물결에서 보듯 정치의 풍향을 앞질러 선도하는 여론과, 작가를 한 발 앞서 이끌어가는 독자와 관객들이 이제는 이 시대의 동력”이라고 했다.

박종필 기자 j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