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 가치 변동에 대한 일본 수출기업의 ‘내성’이 최근 몇 년 새 눈에 띄게 강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해외 생산 확대와 결제 통화 다양화, 고부가가치 제품 수출 등으로 환율 변동의 충격을 줄인 덕분이다. “더 이상 엔화 강세(엔고)가 두렵지 않다”는 일본 기업들의 자신감이 곳곳에서 표출되고 있다.
◆환율과 무관한 수출 증가

니혼게이자이신문은 25일 “중앙은행인 일본은행(BOJ) 분석 결과 엔화 강세가 수출에 미치는 영향력(수출 민감도)이 제로(0) 수준으로 떨어졌다”며 “일본 제조업체의 환율 변동에 대한 내구력이 대폭 강화됐다”고 보도했다.

BOJ 조사에 따르면 2010년대 들어 환율 변동에 관계 없이 수출이 꾸준히 늘어나는 모습을 보이면서 수출의 ‘환율 민감도’가 크게 떨어졌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달러화 대비 엔화 가치가 10%가량 높아지면 일본 기업의 수출이 3% 정도 줄었지만, 2012년 이후로는 0.5% 미만 감소하는 데 그치고 있다.

2016년에는 환율 변동에 따른 수출 민감도가 0.2~0.4%에 불과했다. 급기야 지난해에는 민감도가 -0.1~0%를 오가면서 환율 변동이 수출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결과까지 나왔다. 엔화값 변동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기업 모습은 모두 옛 얘기가 된 셈이다.

최근 몇 년간 엔화 환율이 크게 요동쳤지만 일본의 수출은 꾸준히 개선됐다. 2013년 7월 이후 달러 대비 엔화값은 97.4~124.1엔을 오가는 등 꽤 큰 폭으로 움직였다. 2015년에는 엔화값이 달러당 120엔을 웃도는 엔화 약세가 진행됐고 올 들어서는 달러당 110엔을 밑도는 상대적 엔화 강세가 나타나고 있다.

수출은 이 같은 환율 변동에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다. 일본의 실질수출지수(2015년=100)는 올 4월 115.4로 통계가 작성된 1975년 이후 최고다. 일본은 올 4월까지 46개월 연속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지난해까지 월 5조엔대이던 일본의 수출 규모도 올 들어선 6조엔대 중반~7조엔대를 오가고 있다.

◆“환율 아니라 고부가 제품으로 승부”

일본 기업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환율 변동에 대처하기 위해 노력했다. 생산 시설을 동남아시아 중국 멕시코 미국 등으로 다변화했고 결제통화도 달러 외에 유로화 위안화 등으로 다양화했다. 일본 재무성에 따르면 일본 기업의 달러화 수출 비율은 2017년 상반기 기준 51%로 전체의 절반가량에 불과하다.

혼다는 지난해 달러화 대비 엔화 환율이 1엔 상승할 때 연간 영업이익에 미치는 영향이 140억엔(약 1427억원)으로 5년 전 대비 30억엔(약 305억원)가량 줄었다. 소니는 엔·달러 환율이 1엔 하락할 때 영업이익이 35억엔(약 356억원) 늘도록 기업체질을 완전히 바꿨다.

수출 주력제품의 고부가가치화도 빠르게 진전되고 있다. 일본 재무성이 산출하는 수출고부가가치화지수는 2000년대 초반 0.7대에서 올해 1.2 수준까지 높아졌다. 이 지수가 높아지면 전체 수출 제품 중 부가가치가 높은 수출품의 비중이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과거에는 엔화 약세가 진행되면 시장점유율 확대를 노리고 해외에서 판매가격을 낮추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가격을 동결해 안정적인 수익성을 확보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반도체 제조장치 분야에서 세계시장을 석권하던 도쿄일렉트론과 항공기 엔진분야 강자인 가와사키중공업 등은 환율 변동과 상관없이 ‘제값을 받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다카타 하지메 미즈호종합연구소 연구원은 “일본 기업들이 ‘엔고의 벽’을 지속적으로 넘기 위해선 압도적인 기술 우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해졌다”고 평했다.

도쿄=김동욱 특파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