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 부인 곁에서 영면… 3金 시대 역사에 묻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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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前 총리 영결식
정재계 인사 250여명 배웅속
부여 가족묘원에 안장
생전에 써놓은 묘비명
"나이 90에 이르러 되돌아보니
이룬 것 없음에 절로 한숨 짓는다"
정재계 인사 250여명 배웅속
부여 가족묘원에 안장
생전에 써놓은 묘비명
"나이 90에 이르러 되돌아보니
이룬 것 없음에 절로 한숨 짓는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JP) 영결식이 27일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러졌다. 장례위원장인 이한동 전 국무총리는 “김 전 총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대한민국이 자유와 민주를 만끽하는 오늘을 있게 한 분”이라고 말했다. 이날 영결식엔 유족과 정재계 인사 등 250여 명이 참석해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이로써 한국 정치사의 주인공으로 자리매김했던 ‘3김(金)’은 모두 떠나고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됐다.
영결식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김진봉 운정재단 이사장의 약력보고 후 이 전 총리가 조사를 읊었다. 그는 “김 전 총리 덕에 산업화의 기반 위에 민주화가 싹트고 성장할 수 있었다”며 “모든 고초를 꿋꿋이 이겨내고 주위를 다독이며 웃으시던 모습에 사랑과 존경하는 마음을 버릴 수 없다”고 추모했다. 영정 뒤편으로 문재인 대통령, 이명박 전 대통령 등 전·현직 대통령과 전직 국무총리들이 보낸 조화가 놓였다. 고인에게 수여된 최고 등급 국민훈장인 ‘무궁화장’이 영정의 옆편에 자리했다.
이어 김 전 총리의 오랜 친구로 알려진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일본 총리의 아들 나카소네 히로부미(中曾根康弘) 참의원이 조사를 대독했다. 그는 “옛 친구를 떠나보내 참으로 슬프기 짝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선생께서는 초대 한·일 국회의원 연맹 대표를 지내고 국무총리로서 한·일 공동선언을 추진하는 등 양국 관계 강화를 위해 시종일관 힘썼다”며 “한국 부흥과 경제발전을 위해 중책을 맡아 한시도 마음 편한 날 없이 살아온 인생”이라고 평가했다. 소리꾼 장사익 선생이 조가로 ‘봄날은 간다’를 부르면서 장내 추모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영결식을 마친 뒤 김 전 총리 유해는 운구차에 실려 고인이 생전에 살았던 서울 청구동 자택으로 이동했다. 유족들은 노제를 지내며 그의 영정과 위패를 가슴에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가 구석구석을 돌았다. 딸 예리씨 등 유족들은 자택 대문 앞에 서 있는 운구차 바로 아래에 수박, 배, 사과, 대추 등을 올린 노제상을 차린 후 향을 피우고 절을 했다.
청구동 자택에서는 정우택 정진석 성일종 국회의원 등 80여 명의 유족·측근들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유해는 그의 부인인 고(故) 박영옥 여사와 같은 방식으로 화장됐다. 서울 서초구에 있는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을 끝낸 유해는 다시 운구차에 실려 그가 졸업한 충남 공주고등학교·부여초등학교 교정을 한 바퀴 돌았다.
김 전 총리 유해는 고향 부여 시내를 거쳐 부여군 외산면 가족묘원에 안장됐다. 국립묘지행을 거부하고 부인이 잠든 곳 바로 곁에서 영면에 든 것이다. 묘비엔 그가 직접 쓴 구절 ‘나이 90에 이르러 되돌아보니 제대로 이룬 것 없음에 절로 한숨 짓는다’ ‘숱한 질문에 그저 웃음으로 대답하던 사람, 한평생 반려자인 고마운 아내와 이곳에 누웠노라’ 등의 문구가 씌어 있다.
박종필 기자 jp@hankyung.com
영결식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김진봉 운정재단 이사장의 약력보고 후 이 전 총리가 조사를 읊었다. 그는 “김 전 총리 덕에 산업화의 기반 위에 민주화가 싹트고 성장할 수 있었다”며 “모든 고초를 꿋꿋이 이겨내고 주위를 다독이며 웃으시던 모습에 사랑과 존경하는 마음을 버릴 수 없다”고 추모했다. 영정 뒤편으로 문재인 대통령, 이명박 전 대통령 등 전·현직 대통령과 전직 국무총리들이 보낸 조화가 놓였다. 고인에게 수여된 최고 등급 국민훈장인 ‘무궁화장’이 영정의 옆편에 자리했다.
이어 김 전 총리의 오랜 친구로 알려진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일본 총리의 아들 나카소네 히로부미(中曾根康弘) 참의원이 조사를 대독했다. 그는 “옛 친구를 떠나보내 참으로 슬프기 짝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선생께서는 초대 한·일 국회의원 연맹 대표를 지내고 국무총리로서 한·일 공동선언을 추진하는 등 양국 관계 강화를 위해 시종일관 힘썼다”며 “한국 부흥과 경제발전을 위해 중책을 맡아 한시도 마음 편한 날 없이 살아온 인생”이라고 평가했다. 소리꾼 장사익 선생이 조가로 ‘봄날은 간다’를 부르면서 장내 추모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영결식을 마친 뒤 김 전 총리 유해는 운구차에 실려 고인이 생전에 살았던 서울 청구동 자택으로 이동했다. 유족들은 노제를 지내며 그의 영정과 위패를 가슴에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가 구석구석을 돌았다. 딸 예리씨 등 유족들은 자택 대문 앞에 서 있는 운구차 바로 아래에 수박, 배, 사과, 대추 등을 올린 노제상을 차린 후 향을 피우고 절을 했다.
청구동 자택에서는 정우택 정진석 성일종 국회의원 등 80여 명의 유족·측근들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유해는 그의 부인인 고(故) 박영옥 여사와 같은 방식으로 화장됐다. 서울 서초구에 있는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을 끝낸 유해는 다시 운구차에 실려 그가 졸업한 충남 공주고등학교·부여초등학교 교정을 한 바퀴 돌았다.
김 전 총리 유해는 고향 부여 시내를 거쳐 부여군 외산면 가족묘원에 안장됐다. 국립묘지행을 거부하고 부인이 잠든 곳 바로 곁에서 영면에 든 것이다. 묘비엔 그가 직접 쓴 구절 ‘나이 90에 이르러 되돌아보니 제대로 이룬 것 없음에 절로 한숨 짓는다’ ‘숱한 질문에 그저 웃음으로 대답하던 사람, 한평생 반려자인 고마운 아내와 이곳에 누웠노라’ 등의 문구가 씌어 있다.
박종필 기자 j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