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번홀의 기적.’

박성현이 2일(한국시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KPMG위민스PGA챔피언십 마지막날 4타 차를 뒤집는 대역전극을 연출할 수 있었던 분수령은 16번홀(파4)이었다. 타수를 줄이며 1타 차 공동 2위로 선두 유소연을 뒤쫓고 있던 상황. 3번 우드로 친 티샷이 뒷바람을 타고 예상보다 긴 280야드가량을 날아가는 바람에 해저드 구역 바로 앞 깊은 풀속에서 두 번째 샷을 해야 했다. 이 샷이 공교롭게도 그린과 그린 앞 워터해저드의 경계선에 떨어졌다. 물과 흙, 수초가 뒤엉킨 바닥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공을 쳐내는 것 자체가 힘들 것처럼 보였다. 공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도 어려웠다. 캐디 데이비드 존스가 신발을 신은 채로 물에 들어가 공이 놓인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워터 해저드 앞 풀속에서 홀컵에 바짝 붙인 '로브샷 매직'
발을 해저드 바로 앞까지 내디딘 가운데 박성현은 헤드 페이스를 열고 침착하게 탄도가 높은 로브샷을 만들어냈다. 공은 곡사포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10여m를 날아 홀컵 옆 90㎝에 안착했다. 갤러리의 탄성과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1998년 박세리가 US여자오픈 결승전에서 양말을 벗고 연출한 ‘맨발 샷’을 연상케 하는 ‘매직 샷’이 거짓말처럼 재현된 것이다. 박성현은 자칫 1타 이상을 잃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무실점으로 넘기며 연장 승부의 불씨를 살릴 수 있었다. 유소연은 같은 홀에서 약 10m짜리 내리막 퍼팅을 굴려 넣어 버디를 낚아냈다. 3타 이상으로 벌어질 수 있던 타수 차를 2타로 유지한 박성현은 유소연이 17번홀(파3)에서 티샷 실수로 더블보기를 한 틈을 타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갈 수 있었다.

박성현은 “존스가 공 아래쪽에 물이 없으니 평소처럼 치면 된다고 말해 믿음을 줬다. 벙커샷처럼 쳤는데 임팩트가 잘 됐다”고 말했다.

LPGA투어는 “박세리의 1998년 US여자오픈 때의 샷을 떠올리게 했다”며 “박세리의 맨발 샷은 한국 국민 모두에게 큰 감동을 줬다”고 썼다.

박성현은 박세리처럼 양말을 벗지는 않았다. 하지만 샷을 하고 난 뒤 클럽 페이스에 풀이 두껍게 감길 정도로 어려운 조건에서 강력한 힘과 자신감, 침착함으로 20년 전만큼이나 까다로운 매직 샷을 성공시켰다.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