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기업지배구조 개혁, 안전망부터 쳐야
우리나라는 청년실업 등 고용 문제 해결을 위해 국가 차원에서 총력을 경주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은 인력난 해소를 위해 온 나라가 야단법석이다. 저출산·고령화 사회를 일찍 경험했고 우리보다 더 심각한 경제 불황을 겪은 일본이 아니었던가. ‘세 개의 화살’로 불리는 아베노믹스의 경기 부양 정책과 성장 전략이 주효했다고는 하지만 기업 규제와 관련해서는 오로지 경제 논리로만 접근하는 일본의 오랜 전통도 한몫하고 있다.

일본에서 입법은 주무 대신(장관) 요청에 대한 답신 형태로 이뤄지지만 실제로는 법제심의회에서 정한 로드맵에 따라 이뤄진다. 법제심의회는 관련 전문가로만 구성되고 심의 과정에서의 논의는 전부 공개되며 초안이 마련되면 다시 외부 전문가 의견을 구한 뒤 최종적으로 입법된다. 의원입법은 매우 드물다. 그 결과 법안에 정치 논리가 개입할 여지가 적고 입법도 다른 법이나 제도와의 정합성(整合性)을 고려해 체계적으로 이뤄진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대부분이 의원입법이고, 정치 상황에 따른 입법이 많다 보니 정치 논리가 지배하고 그래서 제도 간 정합성은 무시되고 입법 순서가 뒤바뀌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제도에는 양면성이 있기 때문에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입법 순서다.

낡은 건물을 부술 때도 순서가 있는 법이다. 파편이 튀지 않도록 안전망을 친 뒤 해야 한다. 재벌 규제, 지배구조 개혁은 모두 우리 경제의 낡은 건물을 부수는 작업이다.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하고 기관투자가 역할을 강화해 새 건물을 짓자는 것이다. 그런데 의욕이 앞선 나머지 안전망을 치지 않고 건물부터 부수는 꼴이다 보니 사방팔방으로 튀는 파편으로 인해 온 나라가 시끄럽다. 현대자동차의 엘리엇 사태도 안전망 없이 건물을 부수는 과정에서 발생한 기회비용이다. 방어 수단 없이 순환출자부터 깨부수다가 엘리엇이라는 파편을 맞은 것이다.

일본도 지금 한창 새 건물을 짓고 있다. 그런데 일본의 방법은 우리나라와는 정반대다. 우리나라가 외환위기 직후에 취한 방법은 적대적 인수합병(M&A), 시장 완전 개방, 이사책임 강화, 특정 기관구조 강요 등 규제 강화였다. 일본은 방어 수단 다양화, 이사책임 제한, 기관구조 다양화 등 경영에 유연성을 부여하기 위한 규제 완화였다. 2005년 제정된 일본회사법은 미국의 델라웨어주 회사법 이상으로 유연성을 가진 법률로 평가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일본 경제가 살아나자 지금은 강도 높은 지배구조 개혁을 단행하고 있다. 우리보다 앞서 스튜어드십 코드를 제정하고, 세계 최초로 다중대표소송을 입법화하고, 방어 수단 남용 방지를 위한 규준을 마련하고 있다. 즉, 낡은 건물을 헐기 전에 먼저 안전망부터 친 후 그 안전망이 튼튼하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본격적으로 헌 건물을 헐고 새 건물을 짓고 있는 것이다.

늦었지만 우리도 빨리 안전망을 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다행히 새 정부 들어서 재벌 개혁은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있다. 남은 것은 감사위원 분리선출, 다중대표소송 도입, 집중투표제 의무화 등 지배구조 개혁인데, 이런 것들은 대주주의 의결권을 제한하며 기업집단의 경영 책임을 추궁하고 소수주주 대표의 이사회 진입을 위한 것이다.

이 지배구조 개혁이야말로 안전망 없이 이뤄지면 우리나라 대표 기업의 손발은 묶어 놓은 채 행동주의 펀드나 벌처 펀드같이 단기간에 투자 수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세력들에 예리한 창을 주는 꼴이 된다. 그 결과 우리나라 대표 기업을 이들에게 통째로 내줄 수도 있다. 방어 수단의 도입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여기서도 주의할 것이 있다. 방어 수단을 도입하되 그것이 남용되지 못하도록 하는 방안도 아울러 강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적절한 방어 수단이 없으면 단지 부(富)의 이전효과밖에 없는 나쁜 M&A가 횡행할 것이지만 방어 수단이 있더라도 남용을 막을 장치가 없으면 기업의 건전한 발전을 이끌 좋은 M&A는 시도조차 하기 어렵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