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력 막강했던 신라, 당나라와 海戰 22번 승리… 무역강국으로 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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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10) 바다의 신라인
해군 담당하는 정부부처 '선부'
신라 말까지 존속시킨 해양 강국
일본에 대규모 사절단 파견
거울·향료·염료 등 사치품 교역
동남아·중국산 원료 수입해
정밀 가공, 주변국에 수출
唐, 해상교역 신라군 보호받아
신라함대 대마도 습격하기도
(10) 바다의 신라인
해군 담당하는 정부부처 '선부'
신라 말까지 존속시킨 해양 강국
일본에 대규모 사절단 파견
거울·향료·염료 등 사치품 교역
동남아·중국산 원료 수입해
정밀 가공, 주변국에 수출
唐, 해상교역 신라군 보호받아
신라함대 대마도 습격하기도
해전으로 마무리된 통일
신라의 대외교역은 532년 낙동강 중·하류의 가야국을 병합하고 왜와 외교를 튼 것을 계기로 바다로 방향을 바꿨다. 552년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를 취한 뒤에는 황해를 통한 중국과의 교섭이 활발히 전개됐다. 583년 중앙정부에 선부(船府)가 설치됐다. 선부의 책임자로는 병부(兵部)의 대감이 임명됐다. 이로부터 선부 설치가 군사적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바다의 군사적 중요성은 통일전쟁 과정에서 더욱 높아졌다. 통일의 중대 계기를 이룬 백촌강 전투에서 백제와 일본의 연합군을 격파한 것은 당의 우수한 군선(軍船)이었다. 676년까지 치열하게 이어진 당과의 전쟁은 바다와 연안을 주요 무대로 했다. 675년 9월 설인귀의 당군이 쳐들어 왔는데, 문훈 등이 맞아 싸워 병선 40척을 빼앗았다. 치열한 해전이었다. 676년 11월에는 당과 마지막으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사찬 시득이 병선을 거느리고 설인귀의 당군과 기벌포에서 싸웠는데, 대소 22회 전투에서 승리하고 4000명이나 머리를 벴다. 6~9세기 신라는 해양국가
통일 이후 678년 신라는 선부를 병부에서 독립시키고 별도로 관리를 뒀다. 관리의 지위는 최고 관부인 병부 및 조부(調府)와 동급이었으며, 장관급의 영(令) 1인에는 왕족이 임명됐다. 다시 벌어질지 모를 당과의 전쟁에 대비해 해군력을 부쩍 강화한 조치였다. 681년 통일 대업을 성취한 문무왕은 임종을 맞아서 동해의 호국룡(護國龍)이 되겠으니 자신을 화장해 바다에서 장사지내도록 명했다. 바다 건너 일본이 쳐들어올 것을 경계해서였다. 경북 경주시 양북면 앞바다의 대왕암이 왕의 수중 무덤이다. 731년 일본의 병선 300척이 신라를 침입했는데, 신라가 이들을 대파했다. 해군을 육성해 온 신라의 국방정책이 거둔 성과였다.
757년 경덕왕은 선부를 이제부(利濟部)로 개칭했다. 관제를 중국풍으로 개혁하는 일환이긴 했지만, 평화의 시대가 이어지면서 선부 역할이 군사를 넘어 무역으로까지 확대됐음을 새로운 명칭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제부는 혜공왕에 의해 선부로 명칭이 돌려진 다음 신라 말기까지 존속했다. 후대의 고려와 조선 어느 왕조도 신라의 선부와 같이 바다와 전함을 관장하는 최상급 관부를 설치하지 않았다. 고려왕조는 공조 산하에 선박 건조를 담당한 수조(水曹)라는 관부를 뒀으나 11세기 이후 폐지했다. 조선왕조는 공조 산하에 전함사(典艦司)를 두었다. 종4품의 하급 관서인데, 그마저 17세기 이후 폐지됐다. 6~9세기 신라는 한국사에서 예외적으로 해군을 육성한 해양국가였다. 대외무역의 번성
8~9세기 신라인의 해상활동은 후대의 한국인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활발했다. 일본과의 관계는 적대적이거나 냉담했지만, 그것이 양국의 활발한 교역을 막지는 않았다. 신라는 왜전(倭典)이란 관부를 두어 일본과의 무역을 관장했다. 752년 신라는 7척의 배와 700명으로 이뤄진 대규모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했다. 사절단은 일본의 수도 내량(奈良)에서 공적 교역을 벌였다. 도중의 교통요지인 대재부(大宰府)와 난파(難波)에서도 그들을 맞는 시장이 열렸다. 난파와 내량을 잇는 운하는 신라강(新羅江)이었다. 강의 좌우에는 일본 귀족과 사원 전장(田莊)이 포진했다. 그들은 신라강을 오가는 상선을 통해 신라의 물품을 구매했다. 내량의 동대사(東大寺)는 신라강장(新羅江莊)이란 창고를 두어 신라 물품을 저장했다. 일본에서 신라 물품은 서로 구하려고 경쟁한 인기품이었다. 각급 관청과 귀족들이 제출한 구입 신청서가 30여 장 전해 오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일본이 구한 신라 물품은 대개 가볍고 부피가 작은 거울, 향료, 염료 등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대개 원료가 중국산이나 동남아산으로 신라가 정밀 가공한 제품이었다. 8~9세기 신라 경제는 동시대의 해상 실크로드와 깊게 연결됐으며, 그러한 국제환경에서 번성했다.
신라인의 대외진출
무역만이 아니었다. 신라인의 대외진출도 활발했다. 814년 심한 흉작과 잇따른 내란으로 인해 상당수 신라인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서일본 곳곳에 표착하는 신라인 수가 적지 않았다. 820년 원강(遠江)과 준하(駿河)에 정착한 신라인은 700명이나 됐다. 중국으로 건너간 신라인도 많았다. 일본 승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는 당시 중국으로 이주해 각종 직업에 종사한 신라인에 관한 정보를 풍성히 전하고 있다. 838년 엔닌이 일본을 출발할 때부터 그의 옆에는 신라인 출신 통역이 있었다. 중국에 표착한 엔닌 일행은 바닷길을 잘 아는 신라인 60명을 고용했다. 바다를 따라 북상하는 도중에 그들은 숯 운반선을 탄 신라 상인 10명을 만났다. 엔닌 일행이 도착해 머문 곳은 등주에 있는 구당신라소(句唐新羅所)였다. 등주는 오늘날의 산둥반도다. 거기엔 장보고가 세운 적산원(赤山院)이란 절이 있었다. 절에는 30여 명의 신라 승려가 있었으며, 연간 500석을 추수하는 농장이 딸려 있었다. 법회가 열리면 250명의 신라인이 참가했다.
엔닌이 의도적으로 그의 행렬에서 이탈해 구법의 순례를 떠난 것은 순전히 적산원의 배려와 주선에 의해서였다. 그가 들른 곳곳에는 신라방(新羅坊)이라는 신라인의 자치촌이 있었으며, 신라원(新羅院) 또는 신라관(新羅館)이라는 신라인의 행객이 머무는 숙박시설이 있었다. 당의 수도 장안에는 대략 7~8명의 신라 승려가 있었다. 엔닌이 만난 신라인 가운데는 상인 출신으로 항해 중 일본에 표류했다 돌아온 사람도 있고, 장기간 일본에 체류해 일본어에 능통한 사람도 있었다. 완십삼랑(阮十三郞)과 같이 이름이 일본식인 신라인도 있었다. 완십삼랑의 숙부 이원좌는 종2품의 전중감찰시어사(殿中監察侍御史)였다. 당에서 고관으로 성공한 그는 엔닌이 장안에 체류하는 2년간 그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극진하게 대접했다. 엔닌의 구법 순례는 신라인의 배려와 주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엔닌이 어렵사리 구한 귀국선도 신라 상인의 배였다. 9세기 당에 거주한 신라인은 신라와 일본을 무시로 왕복한 국제상인이자 신실한 불도로서 국적 따위는 알지 못하는 코즈모폴리턴(cosmopolitan)이었다.
장보고의 청해진
737년 발해가 바다를 건너 등주를 침범했다. 이 일을 계기로 당의 현종 황제는 신라의 성덕왕을 영해군사(寧海軍使)로 임명해 해적을 제압하고 해상교역을 보호할 책임을 부여했다. 신라의 강한 해군력이 그 배경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신라 배는 빠르고 풍랑을 견디는 견고함에서 선진적이었다. 신라왕에게 부여된 영해군사의 직은 이후 120년간이나 이어졌다. 828년 신라는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했다. 오늘날의 완도다. 장보고가 청해진의 대사(大使)로 임명됐다. 장보고는 서남해안 출신으로서 당으로 건너가 20~30년간 살면서 장군으로 또는 아마도 무역상인으로 출세한 사람이다. 《삼국사기》는 장보고의 청해진 설치가 해적이 신라인을 당에 노비로 파는 폐단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쓰고 있다. 그렇지만 흥덕왕이 청해진 설치를 승인하고 장보고를 지원한 것은 그의 영해군사직 수행과 연관이 있었다고 보인다. 당도 신라가 그런 목적에서 청해진을 설치하는 것을 납득했다. 그것은 이후 신라가 청해진을 폐지하자 더는 신라왕을 영해군사에 봉하지 않았음으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청해진은 해적을 제압했을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무역을 중개하거나 스스로 무역에 종사함으로써 번성했다. 앞서 소개한 엔닌 일기에 의하면 장보고는 중국 등주의 적산원에 무역선을 파견해 중국 물품을 매집했다. 장보고는 일본 구주(九州)의 대재부에도 무역선을 보냈는데, 물품의 상당 부분은 중국산이었다. 841년 장보고는 신라 조정에 반기를 들고 한동안 권좌를 누리다가 패했다. 이후 851년 청해진은 해체되고 주민은 벽골군으로 옮겨졌다. 청해진의 폐지는 한국사가 바다로부터 멀어지는 중대 계기를 이뤘다. 그렇지만 신라인의 해상활동이 갑자기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일본 측의 기록은 9세기 말까지 신라 해적이 대마도와 서일본 연안을 자주 침범했음을 전하고 있다. 때로는 신라의 해군이 해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894년 신라의 해군은 왕의 명령을 받고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대마도를 습격했는데, 그 규모가 선박 100척과 승선원 2500명에 달했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신라의 대외교역은 532년 낙동강 중·하류의 가야국을 병합하고 왜와 외교를 튼 것을 계기로 바다로 방향을 바꿨다. 552년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를 취한 뒤에는 황해를 통한 중국과의 교섭이 활발히 전개됐다. 583년 중앙정부에 선부(船府)가 설치됐다. 선부의 책임자로는 병부(兵部)의 대감이 임명됐다. 이로부터 선부 설치가 군사적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바다의 군사적 중요성은 통일전쟁 과정에서 더욱 높아졌다. 통일의 중대 계기를 이룬 백촌강 전투에서 백제와 일본의 연합군을 격파한 것은 당의 우수한 군선(軍船)이었다. 676년까지 치열하게 이어진 당과의 전쟁은 바다와 연안을 주요 무대로 했다. 675년 9월 설인귀의 당군이 쳐들어 왔는데, 문훈 등이 맞아 싸워 병선 40척을 빼앗았다. 치열한 해전이었다. 676년 11월에는 당과 마지막으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사찬 시득이 병선을 거느리고 설인귀의 당군과 기벌포에서 싸웠는데, 대소 22회 전투에서 승리하고 4000명이나 머리를 벴다. 6~9세기 신라는 해양국가
통일 이후 678년 신라는 선부를 병부에서 독립시키고 별도로 관리를 뒀다. 관리의 지위는 최고 관부인 병부 및 조부(調府)와 동급이었으며, 장관급의 영(令) 1인에는 왕족이 임명됐다. 다시 벌어질지 모를 당과의 전쟁에 대비해 해군력을 부쩍 강화한 조치였다. 681년 통일 대업을 성취한 문무왕은 임종을 맞아서 동해의 호국룡(護國龍)이 되겠으니 자신을 화장해 바다에서 장사지내도록 명했다. 바다 건너 일본이 쳐들어올 것을 경계해서였다. 경북 경주시 양북면 앞바다의 대왕암이 왕의 수중 무덤이다. 731년 일본의 병선 300척이 신라를 침입했는데, 신라가 이들을 대파했다. 해군을 육성해 온 신라의 국방정책이 거둔 성과였다.
757년 경덕왕은 선부를 이제부(利濟部)로 개칭했다. 관제를 중국풍으로 개혁하는 일환이긴 했지만, 평화의 시대가 이어지면서 선부 역할이 군사를 넘어 무역으로까지 확대됐음을 새로운 명칭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제부는 혜공왕에 의해 선부로 명칭이 돌려진 다음 신라 말기까지 존속했다. 후대의 고려와 조선 어느 왕조도 신라의 선부와 같이 바다와 전함을 관장하는 최상급 관부를 설치하지 않았다. 고려왕조는 공조 산하에 선박 건조를 담당한 수조(水曹)라는 관부를 뒀으나 11세기 이후 폐지했다. 조선왕조는 공조 산하에 전함사(典艦司)를 두었다. 종4품의 하급 관서인데, 그마저 17세기 이후 폐지됐다. 6~9세기 신라는 한국사에서 예외적으로 해군을 육성한 해양국가였다. 대외무역의 번성
8~9세기 신라인의 해상활동은 후대의 한국인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활발했다. 일본과의 관계는 적대적이거나 냉담했지만, 그것이 양국의 활발한 교역을 막지는 않았다. 신라는 왜전(倭典)이란 관부를 두어 일본과의 무역을 관장했다. 752년 신라는 7척의 배와 700명으로 이뤄진 대규모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했다. 사절단은 일본의 수도 내량(奈良)에서 공적 교역을 벌였다. 도중의 교통요지인 대재부(大宰府)와 난파(難波)에서도 그들을 맞는 시장이 열렸다. 난파와 내량을 잇는 운하는 신라강(新羅江)이었다. 강의 좌우에는 일본 귀족과 사원 전장(田莊)이 포진했다. 그들은 신라강을 오가는 상선을 통해 신라의 물품을 구매했다. 내량의 동대사(東大寺)는 신라강장(新羅江莊)이란 창고를 두어 신라 물품을 저장했다. 일본에서 신라 물품은 서로 구하려고 경쟁한 인기품이었다. 각급 관청과 귀족들이 제출한 구입 신청서가 30여 장 전해 오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일본이 구한 신라 물품은 대개 가볍고 부피가 작은 거울, 향료, 염료 등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대개 원료가 중국산이나 동남아산으로 신라가 정밀 가공한 제품이었다. 8~9세기 신라 경제는 동시대의 해상 실크로드와 깊게 연결됐으며, 그러한 국제환경에서 번성했다.
신라인의 대외진출
무역만이 아니었다. 신라인의 대외진출도 활발했다. 814년 심한 흉작과 잇따른 내란으로 인해 상당수 신라인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서일본 곳곳에 표착하는 신라인 수가 적지 않았다. 820년 원강(遠江)과 준하(駿河)에 정착한 신라인은 700명이나 됐다. 중국으로 건너간 신라인도 많았다. 일본 승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는 당시 중국으로 이주해 각종 직업에 종사한 신라인에 관한 정보를 풍성히 전하고 있다. 838년 엔닌이 일본을 출발할 때부터 그의 옆에는 신라인 출신 통역이 있었다. 중국에 표착한 엔닌 일행은 바닷길을 잘 아는 신라인 60명을 고용했다. 바다를 따라 북상하는 도중에 그들은 숯 운반선을 탄 신라 상인 10명을 만났다. 엔닌 일행이 도착해 머문 곳은 등주에 있는 구당신라소(句唐新羅所)였다. 등주는 오늘날의 산둥반도다. 거기엔 장보고가 세운 적산원(赤山院)이란 절이 있었다. 절에는 30여 명의 신라 승려가 있었으며, 연간 500석을 추수하는 농장이 딸려 있었다. 법회가 열리면 250명의 신라인이 참가했다.
엔닌이 의도적으로 그의 행렬에서 이탈해 구법의 순례를 떠난 것은 순전히 적산원의 배려와 주선에 의해서였다. 그가 들른 곳곳에는 신라방(新羅坊)이라는 신라인의 자치촌이 있었으며, 신라원(新羅院) 또는 신라관(新羅館)이라는 신라인의 행객이 머무는 숙박시설이 있었다. 당의 수도 장안에는 대략 7~8명의 신라 승려가 있었다. 엔닌이 만난 신라인 가운데는 상인 출신으로 항해 중 일본에 표류했다 돌아온 사람도 있고, 장기간 일본에 체류해 일본어에 능통한 사람도 있었다. 완십삼랑(阮十三郞)과 같이 이름이 일본식인 신라인도 있었다. 완십삼랑의 숙부 이원좌는 종2품의 전중감찰시어사(殿中監察侍御史)였다. 당에서 고관으로 성공한 그는 엔닌이 장안에 체류하는 2년간 그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극진하게 대접했다. 엔닌의 구법 순례는 신라인의 배려와 주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엔닌이 어렵사리 구한 귀국선도 신라 상인의 배였다. 9세기 당에 거주한 신라인은 신라와 일본을 무시로 왕복한 국제상인이자 신실한 불도로서 국적 따위는 알지 못하는 코즈모폴리턴(cosmopolitan)이었다.
장보고의 청해진
737년 발해가 바다를 건너 등주를 침범했다. 이 일을 계기로 당의 현종 황제는 신라의 성덕왕을 영해군사(寧海軍使)로 임명해 해적을 제압하고 해상교역을 보호할 책임을 부여했다. 신라의 강한 해군력이 그 배경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신라 배는 빠르고 풍랑을 견디는 견고함에서 선진적이었다. 신라왕에게 부여된 영해군사의 직은 이후 120년간이나 이어졌다. 828년 신라는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했다. 오늘날의 완도다. 장보고가 청해진의 대사(大使)로 임명됐다. 장보고는 서남해안 출신으로서 당으로 건너가 20~30년간 살면서 장군으로 또는 아마도 무역상인으로 출세한 사람이다. 《삼국사기》는 장보고의 청해진 설치가 해적이 신라인을 당에 노비로 파는 폐단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쓰고 있다. 그렇지만 흥덕왕이 청해진 설치를 승인하고 장보고를 지원한 것은 그의 영해군사직 수행과 연관이 있었다고 보인다. 당도 신라가 그런 목적에서 청해진을 설치하는 것을 납득했다. 그것은 이후 신라가 청해진을 폐지하자 더는 신라왕을 영해군사에 봉하지 않았음으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청해진은 해적을 제압했을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무역을 중개하거나 스스로 무역에 종사함으로써 번성했다. 앞서 소개한 엔닌 일기에 의하면 장보고는 중국 등주의 적산원에 무역선을 파견해 중국 물품을 매집했다. 장보고는 일본 구주(九州)의 대재부에도 무역선을 보냈는데, 물품의 상당 부분은 중국산이었다. 841년 장보고는 신라 조정에 반기를 들고 한동안 권좌를 누리다가 패했다. 이후 851년 청해진은 해체되고 주민은 벽골군으로 옮겨졌다. 청해진의 폐지는 한국사가 바다로부터 멀어지는 중대 계기를 이뤘다. 그렇지만 신라인의 해상활동이 갑자기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일본 측의 기록은 9세기 말까지 신라 해적이 대마도와 서일본 연안을 자주 침범했음을 전하고 있다. 때로는 신라의 해군이 해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894년 신라의 해군은 왕의 명령을 받고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대마도를 습격했는데, 그 규모가 선박 100척과 승선원 2500명에 달했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