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의 여름별장, 판타지가 펼쳐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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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향기
우지경의 포르투갈 대발견 (8) 신트라에서 카보 다 호카까지
'세상의 끝' 호카곶에서 희망을 외치다
페르난도 2세, 아내를 위해
수도원 터에 '페나 성' 지어
시인 바이런 "위대한 에덴" 예찬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
호카곶의 문구에 가슴 '뭉클'
우지경의 포르투갈 대발견 (8) 신트라에서 카보 다 호카까지
'세상의 끝' 호카곶에서 희망을 외치다
페르난도 2세, 아내를 위해
수도원 터에 '페나 성' 지어
시인 바이런 "위대한 에덴" 예찬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
호카곶의 문구에 가슴 '뭉클'
독일에 노이슈반스타인 성이 있다면, 포르투갈에는 페나 성이 있다. 동화 속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페나 성은 독일 출신 페르난도 2세가 아내를 위해 지은 여름 궁전이다. 페나 성이 있는 신트라(Sintra)는 자연과 중세 건축이 어우러진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일찍이 영국 낭만파 시인 바이런은 신트라를 ‘위대한 에덴’이라 예찬하기도 했다. 신트라에서 조금만 가면 유럽의 최서단 호카곶에 닿는다. 포르투갈의 대항해 시대를 이끌었던 시인 루이스 카몽이스가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고 노래한 바로 그곳이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신트라
참으로 청량한 공기다. 신트라 기차역 앞에서 올라탄 버스 안, 차창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에서부터 초록의 기운이 느껴진다. 구불구불한 언덕을 오를수록 하늘 높이 솟은 키 큰 나무들이 반긴다. 숨을 쉴 때마다 피톤치드가 온몸으로 스미는 것 같다. 신트라에는 3000여 종이 넘는 나무가 살고 있는 까닭이다. 그 덕에 한여름에도 리스본보다 기온이 3~4도 정도 낮다. 왕족과 귀족들이 앞다퉈 신트라에 여름 별장을 지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유서 깊은 건축과 천혜의 자연경관이 조화를 이룬 덕에 1995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수세기 전 말이나 마차를 타고 이 가파른 비탈길을 올랐을 이들을 상상하다 보니 어느새 페나 성문 앞에 도착했다. 여기가 놀이공원이야? 왕궁이야? 입구에서부터 노랑, 빨강 총천연색 벽과 동그란 지붕, 무늬가 화려한 타일 장식이 테마파크처럼 화려한 페나 성의 자태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1840년에 이런 건물을 설계한 이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그 해답은 이내 가이드의 설명을 통해 찾을 수 있었다.
“독일 출신 1840년 페르난도 2세는 폐허가 된 수도원 터에 페나 성을 지었습니다. 아내 마리아 2세를 위한 선물이었지요. 노이슈반스타인 성을 남긴 루트비히 2세와 사촌지간인 페르난도 2세는 노이슈반스타인 성을 만든 건축가 루트비히 폰 에슈테케를 초빙해 노이슈반스타인 성보다 더 환상적인 성을 지어달라고 요청했어요. 그 결과는? 보시다시피 롬바르디아 밴드 양식, 푸른 파란 타일 벽, 마누엘 양식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성이 탄생했지요.”
마리아 여왕의 테라스(The Queen’s Terrace)에서 바라본 페나 성은 한층 더 아름답다. 왕과 왕비의 방, 왕의 아틀리에, 80명이 일했던 주방 등 내부에도 볼거리가 가득하다. 왕의 방을 보면 침대가 매우 작은데, 암살이 두려워 평생 앉아서 잠을 잤다고. 페르난도 2세는 독일 출신답게 맥주를 즐겨 마셨는데, 그가 애용하던 맥주잔도 전시돼 있다. 동화같이 아름다운 성에서도 두 다리 쭉 뻗고 잠들지 못했던 그에게 맥주란 ‘영혼의 안정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궁 구석구석을 카메라에 담아 본다.
“실례합니다만, 길을 잃었나요?” 사진을 찍느라 같은 장소를 뱅글뱅글 돌고 있던 내게 한 안내원이 물었다. 뭐 하는 사람인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가 아니라 다정다감한 눈길로 걱정해준다.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는데, 뭐든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으란다. 페나 궁에서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곳이 어디냐고 했더니 페나 성 브로슈어 뒷면 지도를 펼쳐 들고 크루즈 알타(Cruz Alta)를 가리켰다. 사진가들이 망원렌즈를 들고 오르는 전망 좋은 곳으로, 거기 올라야 페냐 성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 있다고 했다. 왕의 사냥터였던 정원의 숲길이 좋으니 천천히 걸으라는 말도 덧붙였다. 과연 그의 말대로 크루즈 알타에서 바라본 페나 성은 한 폭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친절한 안내원이 아니었다면, 페나 성에서 궁은 보고 숲은 보지 못할 뻔했다. 낭만주의 시대 대표하는 헤갈레이라 정원
신트라를 찾는 한국 관광객들은 대부분 밝고 화사한 페나 성만 보고 발길을 돌리지만, 현지인들은 헤갈레이라 별장(Quinta da Regaleira)이나 몬세라트(Monserrat)로 향한다. 마음을 달래줄 초록의 정원이 그곳에 있다. 녹음이 짙은 숲을 거닐고, 잔디밭 위에서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낸다.
신트라에서 헤갈레이라 별장의 위치를 배우에 비유한다면 조연이다. 하지만 건축보다 정원에 방점을 두면 얘기가 달라진다. 헤갈레이라의 정원은 신 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하는 개성파 배우다. 19세기의 무역상 카르발료 몬테이루(Carvalho Monteiro)는 별장을 지을 때 당대 최고의 건축가와 조각가를 섭외했다. 정원 설계는 이탈리아의 무대 디자이너이자 건축가인 루이지 마니니(Luigi Manini)를 초빙해 맡겼다. 그 결과 로마네스크, 르네상스, 마누엘 양식이 기묘하게 혼합된 건물과 예술가의 상상력이 아낌없이 발휘된 정원이 탄생했다. 이곳이 ‘백만장자 몬테이루의 별장’이라고도 불리는 이유다. 특히 정원은 마치 판타지 영화의 배경 같은 신비감을 자아낸다. 정원을 걷다 보면 벽처럼 보이는 돌문을 밀면 다른 공간으로 연결되거나, 끝을 알 수 없는 지하 동굴이 나타난다. 동굴이 성당과 폭포 호수 타워와 통하는 등 알수록 빠져드는 블랙홀 같은 공간이 이어진다. 3층 테라스에서 정원을 내려다보는 전망도 근사하다. 제대로 정원 곳곳을 누비려면 2시간 이상 걸린다. 정원 산책을 시작할 때, 입구에서 나눠주는 지도를 보며 활용하길 추천한다.
몬세라트 역시 성보다 정원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포르투갈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정원으로 꼽힐 정도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태평양, 중국, 일본, 멕시코 등 전 세계에서 공수해온 3000여 종의 식물로 33헥타르의 대지를 가득 채웠다. 프랑스식 정원처럼 인공적이지 않고 자연미를 극대화하려면 어떻게 조성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는 정원이라 하겠다. 산책보다는 숲과 연못가를 배회하며 걷기 그만이다.
초록 언덕 위에서 정원을 굽어보는 몬세라트 성은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1790년 네오고딕 양식 저택을 지은 영국인 상인 제러드 드 비스메(Gerard de Visme)가 네오고딕 양식으로 짓고, 미술평론가인 윌리엄 벡포드(William Beckford)가 여름 별장으로 삼았다. 1856년 영국의 대상인 프란시스 쿡(Francis Cook)이 성을 사들여 지금의 낭만주의 양식이 화려한 아랍풍 성으로 거듭났다. 이를 포르투갈 정부에서 매입해 일반인에게 개방한 덕에 지금은 누구나 몬세라트의 성과 정원을 즐길 수 있다.
유럽의 최서단, 호카곶에 서다
‘호카에 있는 곳’이란 뜻의 카보 다 호카(Cabo da Roca, 이하 호카곶)는 북위 38도 47분, 동경 9도 30분에 있는 유럽 대륙의 최서단이다. 대서양으로 돌출된 곳으로 14세기 말까지 ‘세상의 끝’이라 여겨졌다.
호카곶에 내려서자 세찬 바람 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호카(Roca)의 ‘R’을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낸 ‘ㅎ’으로 발음하는 포르투갈 사람들의 억양처럼 거친 바람이다. 겉옷을 꺼내 입은 후에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노란 꽃이 핀 언덕이 완만하게 이어지고 그 너머로 대서양이 넘실댄다. 언덕 위에는 주황색 지붕의 등대가 그림처럼 서 있다. 1772년 세워진 포르투갈 최초의 등대로 여전히 주변을 지나는 배를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지금의 등대는 1842년에 재건된 건물이다. 해안을 따라 난 산책로에서 고개를 숙이면 깎아지른 화강암 절벽 아래로 파도가 쉴 새 없이 몰아치며 포말을 만들고 있다.
짙푸른 바다와 어우러진 자연 풍광만큼 시선을 끄는 것은 십자가가 달린 커다란 기념비다. 기념비에는 포르투갈의 국민 시인 루이스 카몽이스의 시구가 새겨져 있다.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 바다 너머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난 포르투갈 탐험가들의 가슴에 용기를 불어넣은 시다. 서쪽의 대서양을 제외하고는 3면이 스페인에 둘러싸인 포르투갈 사람들은 늘 서유럽이 변방에서 스페인 공격에 시달려 왔다. 그래서 육지 대신 대서양으로 나갔다. 그렇게 인도, 마카오, 브라질을 발견하며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1494년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나라가 지구를 양분해 오른쪽은 포르투갈이 왼쪽은 스페인이 나눠 갖기도 했다. 그렇게 포르투갈은 인도 고아, 중국 마카오, 브라질, 아프리카 앙골라 모잠비크 등을 식민지로 삼았다. 식민지에서 실어온 향신료와 금, 커피 등을 유럽에 팔아 부를 축적했다. 그 시절 발길 닿은 곳이 다 내 영토라는 포르투갈의 과욕을 칭송할 순 없지만, 지형적 약점을 기회로 승화시킨 도전 정신만은 높이 살 만하다.
한때 세상의 끝, 호카곶에 선 여행자들은 가슴 뭉클한 무언가를 발견하곤 한다. 살면서, 절벽 끝에 몰리더라도 호카곶을 떠올리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그리곤 ‘여기 멋진 여행이 끝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상쾌한 기분으로 돌아서게 된다. 또 다른 세상을 향해.
신트라=글·사진 우지경 여행작가
traveletter@naver.com ▶여행정보
신트라와 호카곶은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근교 여행지다. 단 이동 시간을 잘 계산해서 일정을 잡아야 여행이 편안해진다. 신트라는 리스본 중심의 호시우 기차역에서 국철을 타면 45분 만에 도착한다. 기차는 새벽 6시께부터 밤 12시까지 20~3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렌터카를 빌려 운전해서 간다면 약 30분 거리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N6 해안도로를 타고 가다가 A16번 도로로 진입하는 낭만 드라이브 코스를 추천한다. 신트라에 도착한 후 페나 성, 헤겔레이라 별장 등으로 이동할 때는 신트라를 순환하는 버스 433, 434, 435번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호카곶은 신트라 기차역 앞에서 403번 버스를 타면 약 35분 걸린다. 호카곶에서 리스본으로 돌아올 때는 403번 버스를 타고 카스카이스까지 이동한 후 카스카이스 역에서 국철을 타고 카이스 두 소드레 역으로 돌아오는 편이 빠르다. 카스카이스에서 리스본까지는 약 40분 소요된다.
참으로 청량한 공기다. 신트라 기차역 앞에서 올라탄 버스 안, 차창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에서부터 초록의 기운이 느껴진다. 구불구불한 언덕을 오를수록 하늘 높이 솟은 키 큰 나무들이 반긴다. 숨을 쉴 때마다 피톤치드가 온몸으로 스미는 것 같다. 신트라에는 3000여 종이 넘는 나무가 살고 있는 까닭이다. 그 덕에 한여름에도 리스본보다 기온이 3~4도 정도 낮다. 왕족과 귀족들이 앞다퉈 신트라에 여름 별장을 지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유서 깊은 건축과 천혜의 자연경관이 조화를 이룬 덕에 1995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수세기 전 말이나 마차를 타고 이 가파른 비탈길을 올랐을 이들을 상상하다 보니 어느새 페나 성문 앞에 도착했다. 여기가 놀이공원이야? 왕궁이야? 입구에서부터 노랑, 빨강 총천연색 벽과 동그란 지붕, 무늬가 화려한 타일 장식이 테마파크처럼 화려한 페나 성의 자태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1840년에 이런 건물을 설계한 이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그 해답은 이내 가이드의 설명을 통해 찾을 수 있었다.
“독일 출신 1840년 페르난도 2세는 폐허가 된 수도원 터에 페나 성을 지었습니다. 아내 마리아 2세를 위한 선물이었지요. 노이슈반스타인 성을 남긴 루트비히 2세와 사촌지간인 페르난도 2세는 노이슈반스타인 성을 만든 건축가 루트비히 폰 에슈테케를 초빙해 노이슈반스타인 성보다 더 환상적인 성을 지어달라고 요청했어요. 그 결과는? 보시다시피 롬바르디아 밴드 양식, 푸른 파란 타일 벽, 마누엘 양식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성이 탄생했지요.”
마리아 여왕의 테라스(The Queen’s Terrace)에서 바라본 페나 성은 한층 더 아름답다. 왕과 왕비의 방, 왕의 아틀리에, 80명이 일했던 주방 등 내부에도 볼거리가 가득하다. 왕의 방을 보면 침대가 매우 작은데, 암살이 두려워 평생 앉아서 잠을 잤다고. 페르난도 2세는 독일 출신답게 맥주를 즐겨 마셨는데, 그가 애용하던 맥주잔도 전시돼 있다. 동화같이 아름다운 성에서도 두 다리 쭉 뻗고 잠들지 못했던 그에게 맥주란 ‘영혼의 안정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궁 구석구석을 카메라에 담아 본다.
“실례합니다만, 길을 잃었나요?” 사진을 찍느라 같은 장소를 뱅글뱅글 돌고 있던 내게 한 안내원이 물었다. 뭐 하는 사람인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가 아니라 다정다감한 눈길로 걱정해준다.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는데, 뭐든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으란다. 페나 궁에서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곳이 어디냐고 했더니 페나 성 브로슈어 뒷면 지도를 펼쳐 들고 크루즈 알타(Cruz Alta)를 가리켰다. 사진가들이 망원렌즈를 들고 오르는 전망 좋은 곳으로, 거기 올라야 페냐 성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 있다고 했다. 왕의 사냥터였던 정원의 숲길이 좋으니 천천히 걸으라는 말도 덧붙였다. 과연 그의 말대로 크루즈 알타에서 바라본 페나 성은 한 폭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친절한 안내원이 아니었다면, 페나 성에서 궁은 보고 숲은 보지 못할 뻔했다. 낭만주의 시대 대표하는 헤갈레이라 정원
신트라를 찾는 한국 관광객들은 대부분 밝고 화사한 페나 성만 보고 발길을 돌리지만, 현지인들은 헤갈레이라 별장(Quinta da Regaleira)이나 몬세라트(Monserrat)로 향한다. 마음을 달래줄 초록의 정원이 그곳에 있다. 녹음이 짙은 숲을 거닐고, 잔디밭 위에서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낸다.
신트라에서 헤갈레이라 별장의 위치를 배우에 비유한다면 조연이다. 하지만 건축보다 정원에 방점을 두면 얘기가 달라진다. 헤갈레이라의 정원은 신 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하는 개성파 배우다. 19세기의 무역상 카르발료 몬테이루(Carvalho Monteiro)는 별장을 지을 때 당대 최고의 건축가와 조각가를 섭외했다. 정원 설계는 이탈리아의 무대 디자이너이자 건축가인 루이지 마니니(Luigi Manini)를 초빙해 맡겼다. 그 결과 로마네스크, 르네상스, 마누엘 양식이 기묘하게 혼합된 건물과 예술가의 상상력이 아낌없이 발휘된 정원이 탄생했다. 이곳이 ‘백만장자 몬테이루의 별장’이라고도 불리는 이유다. 특히 정원은 마치 판타지 영화의 배경 같은 신비감을 자아낸다. 정원을 걷다 보면 벽처럼 보이는 돌문을 밀면 다른 공간으로 연결되거나, 끝을 알 수 없는 지하 동굴이 나타난다. 동굴이 성당과 폭포 호수 타워와 통하는 등 알수록 빠져드는 블랙홀 같은 공간이 이어진다. 3층 테라스에서 정원을 내려다보는 전망도 근사하다. 제대로 정원 곳곳을 누비려면 2시간 이상 걸린다. 정원 산책을 시작할 때, 입구에서 나눠주는 지도를 보며 활용하길 추천한다.
몬세라트 역시 성보다 정원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포르투갈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정원으로 꼽힐 정도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태평양, 중국, 일본, 멕시코 등 전 세계에서 공수해온 3000여 종의 식물로 33헥타르의 대지를 가득 채웠다. 프랑스식 정원처럼 인공적이지 않고 자연미를 극대화하려면 어떻게 조성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는 정원이라 하겠다. 산책보다는 숲과 연못가를 배회하며 걷기 그만이다.
초록 언덕 위에서 정원을 굽어보는 몬세라트 성은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1790년 네오고딕 양식 저택을 지은 영국인 상인 제러드 드 비스메(Gerard de Visme)가 네오고딕 양식으로 짓고, 미술평론가인 윌리엄 벡포드(William Beckford)가 여름 별장으로 삼았다. 1856년 영국의 대상인 프란시스 쿡(Francis Cook)이 성을 사들여 지금의 낭만주의 양식이 화려한 아랍풍 성으로 거듭났다. 이를 포르투갈 정부에서 매입해 일반인에게 개방한 덕에 지금은 누구나 몬세라트의 성과 정원을 즐길 수 있다.
유럽의 최서단, 호카곶에 서다
‘호카에 있는 곳’이란 뜻의 카보 다 호카(Cabo da Roca, 이하 호카곶)는 북위 38도 47분, 동경 9도 30분에 있는 유럽 대륙의 최서단이다. 대서양으로 돌출된 곳으로 14세기 말까지 ‘세상의 끝’이라 여겨졌다.
호카곶에 내려서자 세찬 바람 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호카(Roca)의 ‘R’을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낸 ‘ㅎ’으로 발음하는 포르투갈 사람들의 억양처럼 거친 바람이다. 겉옷을 꺼내 입은 후에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노란 꽃이 핀 언덕이 완만하게 이어지고 그 너머로 대서양이 넘실댄다. 언덕 위에는 주황색 지붕의 등대가 그림처럼 서 있다. 1772년 세워진 포르투갈 최초의 등대로 여전히 주변을 지나는 배를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지금의 등대는 1842년에 재건된 건물이다. 해안을 따라 난 산책로에서 고개를 숙이면 깎아지른 화강암 절벽 아래로 파도가 쉴 새 없이 몰아치며 포말을 만들고 있다.
짙푸른 바다와 어우러진 자연 풍광만큼 시선을 끄는 것은 십자가가 달린 커다란 기념비다. 기념비에는 포르투갈의 국민 시인 루이스 카몽이스의 시구가 새겨져 있다.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 바다 너머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난 포르투갈 탐험가들의 가슴에 용기를 불어넣은 시다. 서쪽의 대서양을 제외하고는 3면이 스페인에 둘러싸인 포르투갈 사람들은 늘 서유럽이 변방에서 스페인 공격에 시달려 왔다. 그래서 육지 대신 대서양으로 나갔다. 그렇게 인도, 마카오, 브라질을 발견하며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1494년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나라가 지구를 양분해 오른쪽은 포르투갈이 왼쪽은 스페인이 나눠 갖기도 했다. 그렇게 포르투갈은 인도 고아, 중국 마카오, 브라질, 아프리카 앙골라 모잠비크 등을 식민지로 삼았다. 식민지에서 실어온 향신료와 금, 커피 등을 유럽에 팔아 부를 축적했다. 그 시절 발길 닿은 곳이 다 내 영토라는 포르투갈의 과욕을 칭송할 순 없지만, 지형적 약점을 기회로 승화시킨 도전 정신만은 높이 살 만하다.
한때 세상의 끝, 호카곶에 선 여행자들은 가슴 뭉클한 무언가를 발견하곤 한다. 살면서, 절벽 끝에 몰리더라도 호카곶을 떠올리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그리곤 ‘여기 멋진 여행이 끝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상쾌한 기분으로 돌아서게 된다. 또 다른 세상을 향해.
신트라=글·사진 우지경 여행작가
traveletter@naver.com ▶여행정보
신트라와 호카곶은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근교 여행지다. 단 이동 시간을 잘 계산해서 일정을 잡아야 여행이 편안해진다. 신트라는 리스본 중심의 호시우 기차역에서 국철을 타면 45분 만에 도착한다. 기차는 새벽 6시께부터 밤 12시까지 20~3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렌터카를 빌려 운전해서 간다면 약 30분 거리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N6 해안도로를 타고 가다가 A16번 도로로 진입하는 낭만 드라이브 코스를 추천한다. 신트라에 도착한 후 페나 성, 헤겔레이라 별장 등으로 이동할 때는 신트라를 순환하는 버스 433, 434, 435번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호카곶은 신트라 기차역 앞에서 403번 버스를 타면 약 35분 걸린다. 호카곶에서 리스본으로 돌아올 때는 403번 버스를 타고 카스카이스까지 이동한 후 카스카이스 역에서 국철을 타고 카이스 두 소드레 역으로 돌아오는 편이 빠르다. 카스카이스에서 리스본까지는 약 40분 소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