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진 역사 속에 묻힌 민초의 恨… 붉은 술 한잔에 시름을 달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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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향기
강제윤 시인의 새로 쓰는 '섬 택리지'
<21> 진도
강제윤 시인의 새로 쓰는 '섬 택리지'
<21> 진도
토종견인 진돗개와 진도 아리랑 등으로 대표되는 진도는 원형의 섬이다. 오랜 세월 독자적인 문화를 지켜온 섬. 진도가 섬 고유의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육지와 격리돼 있으면서도 자급자족할 만큼 농토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진도로 인해 우리는 잃어버린 고향의 원형을 간직할 수 있게 됐다. 그런 진도가 역사상 크게 세 번, 타의에 의해 참혹한 희생을 치렀다. 가장 최근이 세월호 참사다. 세월호 참사로 꽃 같은 목숨들이 희생됐고 그 유족들은 참혹한 고통을 겪었다. 그동안 상주를 자처했던 진도 사람들 또한 그에 못지않은 고통을 겪었다. 세월호 참사 후 고통과 직면하는 것이 싫어서 사람들은 진도를 외면하고 심지어 진도산 수산물을 기피하기도 했다. 세월호는 지상으로 나왔으나 여전히 진도는 수면에 떠오르지 못하고 힘겹다.
왜군 특공대에게 보복당한 진도의 아픔
또 하나는 명량해전 승리 뒤에 숨겨진 진도의 희생이다. 그 증거가 진도군 고군면 도평리 일대에 있는 정유재란 순절자 묘역이다. 하지만 승리를 칭송하기 바빠 누구도 이 묘역을 주목하지 않는다. 이 묘역에는 뼈아픈 역사의 진실이 매장돼 있다. 역사는 명량해전 승리를 이순신 장군의 승리로만 기록한다. 그러나 전투는 진도 주민 희생으로 이룬 피어린 승리였다. 명량해전에 대한 평가는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전함으로 적 함대 133척에 맞서 전함 31척을 파손한 대승으로 기억한다. 아군 전함은 전혀 손실이 없었고 단 2명의 사망자와 부상자도 2명뿐인 완벽한 승리. 하지만 이것이 전부일까? 전투의 승리가 진정 승리로만 끝난 것일까. 아니다. 명량해전 전후로 수없이 많은 진도와 해남 우수영 주민이 희생됐다.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 함대는 왜군 함대가 전열을 정비해 공격하기 전에 서둘러 진도를 떠나 피신해야 했다. 다시 전투가 시작된다면 그야말로 승산 없는 전투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순신 함대가 신안 당사도와 부안 위도를 거쳐 군산 선유도까지 올라가 은신한 사이 진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야말로 진도는 인간 도살장이 됐다. 진도 사람들이 명량해전의 뒷감당을 한 것이다. 왜군은 진도에 상륙해 진도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도륙하며 이순신 함대에 패배한 보복을 자행했다. 이순신의 고향 아산 사람들의 희생도 뒤따랐다. 이순신에 대한 보복을 위해 조직된 왜군 특공대는 아산을 불바다로 만들었고 그 와중에 이순신의 셋째 아들 면도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즉각적인 보복의 대상이 되고 가장 막심한 피해를 입은 것은 진도 사람들이었다. 정유재란 순절자 묘역에는 진도 사람 조응량 등 232기의 시신이 묻혀 있다. 양반들 몇을 제외한 일반 백성들은 그 이름조차 없다.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진실이 봉분으로 기록된 것이다. 시신이 수습돼 무덤에 묻힌 이들이 232명일 뿐, 실제 얼마나 더 많은 진도 사람들이 살육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언제까지 명량해전을 완벽한 승리로만 기억해야 할까. 삼별초 시절 강제 노역에 시달리기도
또 하나 진도의 희생은 고려 말 항몽 전쟁 시기다. 진도에는 항몽 유적지가 많다. 강화도에서 반란을 일으킨 삼별초가 새로운 근거지로 삼은 곳이 바로 진도였기 때문이다. 용장산성, 남도진성, 배중손 사당, 왕온의 묘 등이 삼별초 시절 유물이다. 역사적 평가와 달리 진도라는 섬 주민 입장에서 삼별초는 점령군과 다름없었다. 30년 전쟁을 종식시키고 무신 정권에 빼앗긴 왕권을 되찾기 위해 고려가 원나라에 굴복해 강화협정을 하고 개경 천도를 단행하자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김통정, 배중손 등의 삼별초 지도부는 왕실 종친이었던 왕온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고 진도로 근거지를 옮겼다. 1000여 척의 선단을 이끌고 진도를 점령한 삼별초는 항몽 근거지인 용장산성을 개축하고 용장사를 왕궁으로 건설하며 수많은 진도 주민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했다. 진도 삼별초의 항몽 운동 이면에는 항몽과 함께 무신권력의 유지 의도가 담겨 있었고 진도 주민들은 그 희생양이었다. 강화 시절에도 내륙의 백성들이 몽고군 칼날에 도륙당할 때 무신들은 호의호식하며 권력 투쟁에 몰두했고, 그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이 삼별초였다. 그들은 심지어 몽고 침략으로 고통받던 고려 본토의 농민항쟁을 진압하고 살육을 일삼지 않았던가.
진도 주민들은 여몽연합군의 진도 공격 때는 화살받이가 돼 목숨을 잃었고 삼별초난이 진압된 뒤에는 또 포로로 끌려갔다. 삼별초 진압 뒤 진도에서 포로로 잡힌 사람이 1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들 중에는 죄 없는 진도 사람도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삼별초난이 평정된 뒤에는 진도 주민 전체가 영암과 해남으로 강제 이주당해 섬은 텅 비었고 주민들은 89년 동안이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디아스포라가 돼야 했다. 하지만 우리 역사는 삼별초 항쟁만 가르치지 진도 사람들 희생에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이게 과연 온당한 역사 인식일까. 약초인 지초와 결합돼 만들어진 증류주
진도 사람들은 어떻게 그 슬픔을 견디며 살아왔을까.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한을 달래고 그 독한 진도 홍주를 마시며 시름을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진도 아리랑이나 진돗개 못지않은 진도의 보물은 홍주다. 진도의 대표 전통술인 홍주는 고려 말부터 빚어지기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전통 명주인데, 항몽 전쟁 시기 몽고로부터 유입된 소주 제조법이 진도 지방으로 들어오면서 진도 사람들이 애용하던 약초인 지초와 결합돼 빚어진 증류주다. 술을 담글 때는 쌀·보리·수수 등을 주정으로 쓰는데, 한 가지 원료만 쓰기도 하고 섞어서 사용하기도 한다. 오랜 세월 이어져 내려오던 홍주는 한동안 밀주 단속 때문에 단절 위기도 있었지만 해방 후 생활이 어려운 여인들이 생계 수단으로 몰래 담가오면서 비법이 전해져 오늘에 이르렀다. 요즘은 전통 방식으로 빚는 곳은 많지 않고 유통되는 대부분이 공장 술이다.
진도 읍내에서 4~5명 정도만 손으로 직접 빚어서 판다. 읍내 선술집에서 찹쌀로 빚은 홍주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 찹쌀 홍주는 멥쌀로 빚은 것보다 훨씬 더 부드럽다. 목 넘김에 거친 맛이 전혀 없다. 나는 인간문화재였던 홍주 명인 허화자 선생이 돌아가시고 난 뒤 다른 홍주들은 좀처럼 입에도 안 댔는데, 찹쌀 홍주를 맛보고 난 뒤 비로소 홍주에 대한 입맛을 되찾았다. 진도 홍주에 대해서는 안 좋은 기억을 가진 사람이 의외로 많다. 뒤끝이 있는 술로 유명하다. 하지만 손으로 직접 불을 때서 소줏 고리로 내려 빚는 전통 홍주는 맛도 뛰어나고 뒤끝이 전혀 없다.
만드는 과정이 너무나 힘들고 이익도 거의 없어 점차 소멸해 가는 수제 홍주는 그 자체로 보물이다. 찹쌀 홍주 할머니는 혼자서 직접 홍주를 내리는데 잘 나와야 한 달에 20되 정도밖에 못 만드신다. 홍주를 빚어서 다 팔아봐야 한 달 수입이 100만원 남짓 될 뿐이다. 누룩, 보리, 찹쌀, 지초 등 재료비를 제외하면 대체 몇 푼이나 남겠는가 싶다. 홍주 빚어서 겨우 생계비나 하고 살아갈 뿐이다.
할머니는 남편이 교사로 일했고 말년에는 교장으로 재직하다 퇴직했다. 그래서 홍주 빚는 법을 배운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15년 정도 경력이다. 진도에서 홍주를 빚다가 서울의 자식들 집에 살던 사촌언니가 진도로 내려왔는데 자신의 집은 좁아서 술을 만들 수 없었다. 할머니 집이 넓으니 술을 빚게 해 달라고 해서 장소를 내줬다. 그때부터 언니 옆에서 홍주 빚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5년간 보조로 배우다 언니가 돌아가시자 10년 전부터는 혼자서 홍주를 빚어 오고 있다. 언니는 주정을 멥쌀로 했는데 술이 더 부드러울 것 같아서 값비싼 찹쌀을 쓰기 시작했고, 실제로 빚어 보니 훨씬 순했다. 그래서 지금껏 찹쌀 홍주를 만들어 오고 있다.
인고를 견디며 살아온 진도의 눈물 홍주
술 빚는 일을 계속하는 것은 남편이 죽은 뒤 아들의 사업 실패로 살림이 어려워졌고 손자들을 돌봐야 하기 때문이다. 전통은 생계를 통해 이어진다. 누룩은 밀누룩을 쓴다. 오일장날 장에서 사온다. 홍주를 내리기 위해서는 먼저 원주인 막걸리를 만든다. 증류주는 고리로 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은 원주가 좋아야 한다. 한 번에 2말짜리 7솥(14말) 분량의 막걸리를 만든다. 2말짜리 막걸리 1솥을 증류하면 많이 나올 때는 4되, 적게 나오면 3.5되쯤 나온다. 막걸리를 만들려면 먼저 4되의 누룩 가루와 가마솥에 쪄서 식힌 3말의 찐보리를 섞어 준다. 누룩과 섞은 보리를 자루에 넣은 다음 볏짚 위에서 7일 정도 띄운다. 7일 뒤면 보리가 아주 딴딴해진다. 누룩 덩어리처럼 ‘꼬실꼬실하니 깡깡하게’ 된다. 보리에는 붉고, 노랗고, 파란색 곰팡이가 골고루 핀다. 그래야 잘 띄워진 것이다. 한 가지 색만 나오면 썩어버린 것이다.
누룩이 잘 띄워지면 술통에 물을 부은 뒤 보리누룩 덩어리를 넣고 밑술을 만든다. 여름철에는 ‘버글버글’ 끓기 시작해 5일 정도면 잘 삭아서 푹 풀린다. 5일 후에는 찹쌀 3말을 물에 담가 뒀다가 시루에 찐 뒤 술통에 넣는다. 그대로 10일 정도를 다시 발효시킨다. 찹쌀까지 발효가 되면 식혜처럼 쌀알이 동동 뜬다. 잘 익은 막걸리를 건더기까지 솥에다 넣고 소줏고리를 올린다. 고리 위에는 찬물을 번갈아가며 부어 주면서 장작불을 때 끓인다. 가마솥의 뜨거운 술이 끓으면 증기가 위의 찬물에 부딪치면서 술방울이 고리를 통해 내려온다. 술방울이 떨어지는 주둥이 아래 작은 오가리에 두 손 가득한 분량의 지초를 거름망에 담아 두면 술방울이 지초를 통과하며 붉은 색을 우려낸다. 고되고 지난한 과정을 거친 이슬 같은 술방울이 방울방울 모여 붉은 빛 홍주가 탄생한다. 홍주는 마치 오랜 세월, 인고를 견디며 살아온 진도의 눈물 같다. 홍보석 같은 수제 찹쌀 홍주 한 잔을 마시니 더없이 부드럽다. 비로소 여행자의 몸도 마음도 풀어진다. 역사를 보는 새로운 눈을 뜨고 역사가 빚은 붉은 술 한 잔을 찾아 떠나는 진도 여행. 이보다 더 뜻 깊은 여행이 또 있을까!
강제윤 시인은
강제윤 시인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 답사 공동체 인문학습원인 섬학교 교장이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통영은 맛있다》《섬을 걷다》 《바다의 노스텔지어, 파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또 하나는 명량해전 승리 뒤에 숨겨진 진도의 희생이다. 그 증거가 진도군 고군면 도평리 일대에 있는 정유재란 순절자 묘역이다. 하지만 승리를 칭송하기 바빠 누구도 이 묘역을 주목하지 않는다. 이 묘역에는 뼈아픈 역사의 진실이 매장돼 있다. 역사는 명량해전 승리를 이순신 장군의 승리로만 기록한다. 그러나 전투는 진도 주민 희생으로 이룬 피어린 승리였다. 명량해전에 대한 평가는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전함으로 적 함대 133척에 맞서 전함 31척을 파손한 대승으로 기억한다. 아군 전함은 전혀 손실이 없었고 단 2명의 사망자와 부상자도 2명뿐인 완벽한 승리. 하지만 이것이 전부일까? 전투의 승리가 진정 승리로만 끝난 것일까. 아니다. 명량해전 전후로 수없이 많은 진도와 해남 우수영 주민이 희생됐다.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 함대는 왜군 함대가 전열을 정비해 공격하기 전에 서둘러 진도를 떠나 피신해야 했다. 다시 전투가 시작된다면 그야말로 승산 없는 전투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순신 함대가 신안 당사도와 부안 위도를 거쳐 군산 선유도까지 올라가 은신한 사이 진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야말로 진도는 인간 도살장이 됐다. 진도 사람들이 명량해전의 뒷감당을 한 것이다. 왜군은 진도에 상륙해 진도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도륙하며 이순신 함대에 패배한 보복을 자행했다. 이순신의 고향 아산 사람들의 희생도 뒤따랐다. 이순신에 대한 보복을 위해 조직된 왜군 특공대는 아산을 불바다로 만들었고 그 와중에 이순신의 셋째 아들 면도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즉각적인 보복의 대상이 되고 가장 막심한 피해를 입은 것은 진도 사람들이었다. 정유재란 순절자 묘역에는 진도 사람 조응량 등 232기의 시신이 묻혀 있다. 양반들 몇을 제외한 일반 백성들은 그 이름조차 없다.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진실이 봉분으로 기록된 것이다. 시신이 수습돼 무덤에 묻힌 이들이 232명일 뿐, 실제 얼마나 더 많은 진도 사람들이 살육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언제까지 명량해전을 완벽한 승리로만 기억해야 할까. 삼별초 시절 강제 노역에 시달리기도
또 하나 진도의 희생은 고려 말 항몽 전쟁 시기다. 진도에는 항몽 유적지가 많다. 강화도에서 반란을 일으킨 삼별초가 새로운 근거지로 삼은 곳이 바로 진도였기 때문이다. 용장산성, 남도진성, 배중손 사당, 왕온의 묘 등이 삼별초 시절 유물이다. 역사적 평가와 달리 진도라는 섬 주민 입장에서 삼별초는 점령군과 다름없었다. 30년 전쟁을 종식시키고 무신 정권에 빼앗긴 왕권을 되찾기 위해 고려가 원나라에 굴복해 강화협정을 하고 개경 천도를 단행하자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김통정, 배중손 등의 삼별초 지도부는 왕실 종친이었던 왕온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고 진도로 근거지를 옮겼다. 1000여 척의 선단을 이끌고 진도를 점령한 삼별초는 항몽 근거지인 용장산성을 개축하고 용장사를 왕궁으로 건설하며 수많은 진도 주민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했다. 진도 삼별초의 항몽 운동 이면에는 항몽과 함께 무신권력의 유지 의도가 담겨 있었고 진도 주민들은 그 희생양이었다. 강화 시절에도 내륙의 백성들이 몽고군 칼날에 도륙당할 때 무신들은 호의호식하며 권력 투쟁에 몰두했고, 그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이 삼별초였다. 그들은 심지어 몽고 침략으로 고통받던 고려 본토의 농민항쟁을 진압하고 살육을 일삼지 않았던가.
진도 주민들은 여몽연합군의 진도 공격 때는 화살받이가 돼 목숨을 잃었고 삼별초난이 진압된 뒤에는 또 포로로 끌려갔다. 삼별초 진압 뒤 진도에서 포로로 잡힌 사람이 1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들 중에는 죄 없는 진도 사람도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삼별초난이 평정된 뒤에는 진도 주민 전체가 영암과 해남으로 강제 이주당해 섬은 텅 비었고 주민들은 89년 동안이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디아스포라가 돼야 했다. 하지만 우리 역사는 삼별초 항쟁만 가르치지 진도 사람들 희생에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이게 과연 온당한 역사 인식일까. 약초인 지초와 결합돼 만들어진 증류주
진도 사람들은 어떻게 그 슬픔을 견디며 살아왔을까.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한을 달래고 그 독한 진도 홍주를 마시며 시름을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진도 아리랑이나 진돗개 못지않은 진도의 보물은 홍주다. 진도의 대표 전통술인 홍주는 고려 말부터 빚어지기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전통 명주인데, 항몽 전쟁 시기 몽고로부터 유입된 소주 제조법이 진도 지방으로 들어오면서 진도 사람들이 애용하던 약초인 지초와 결합돼 빚어진 증류주다. 술을 담글 때는 쌀·보리·수수 등을 주정으로 쓰는데, 한 가지 원료만 쓰기도 하고 섞어서 사용하기도 한다. 오랜 세월 이어져 내려오던 홍주는 한동안 밀주 단속 때문에 단절 위기도 있었지만 해방 후 생활이 어려운 여인들이 생계 수단으로 몰래 담가오면서 비법이 전해져 오늘에 이르렀다. 요즘은 전통 방식으로 빚는 곳은 많지 않고 유통되는 대부분이 공장 술이다.
진도 읍내에서 4~5명 정도만 손으로 직접 빚어서 판다. 읍내 선술집에서 찹쌀로 빚은 홍주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 찹쌀 홍주는 멥쌀로 빚은 것보다 훨씬 더 부드럽다. 목 넘김에 거친 맛이 전혀 없다. 나는 인간문화재였던 홍주 명인 허화자 선생이 돌아가시고 난 뒤 다른 홍주들은 좀처럼 입에도 안 댔는데, 찹쌀 홍주를 맛보고 난 뒤 비로소 홍주에 대한 입맛을 되찾았다. 진도 홍주에 대해서는 안 좋은 기억을 가진 사람이 의외로 많다. 뒤끝이 있는 술로 유명하다. 하지만 손으로 직접 불을 때서 소줏 고리로 내려 빚는 전통 홍주는 맛도 뛰어나고 뒤끝이 전혀 없다.
만드는 과정이 너무나 힘들고 이익도 거의 없어 점차 소멸해 가는 수제 홍주는 그 자체로 보물이다. 찹쌀 홍주 할머니는 혼자서 직접 홍주를 내리는데 잘 나와야 한 달에 20되 정도밖에 못 만드신다. 홍주를 빚어서 다 팔아봐야 한 달 수입이 100만원 남짓 될 뿐이다. 누룩, 보리, 찹쌀, 지초 등 재료비를 제외하면 대체 몇 푼이나 남겠는가 싶다. 홍주 빚어서 겨우 생계비나 하고 살아갈 뿐이다.
할머니는 남편이 교사로 일했고 말년에는 교장으로 재직하다 퇴직했다. 그래서 홍주 빚는 법을 배운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15년 정도 경력이다. 진도에서 홍주를 빚다가 서울의 자식들 집에 살던 사촌언니가 진도로 내려왔는데 자신의 집은 좁아서 술을 만들 수 없었다. 할머니 집이 넓으니 술을 빚게 해 달라고 해서 장소를 내줬다. 그때부터 언니 옆에서 홍주 빚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5년간 보조로 배우다 언니가 돌아가시자 10년 전부터는 혼자서 홍주를 빚어 오고 있다. 언니는 주정을 멥쌀로 했는데 술이 더 부드러울 것 같아서 값비싼 찹쌀을 쓰기 시작했고, 실제로 빚어 보니 훨씬 순했다. 그래서 지금껏 찹쌀 홍주를 만들어 오고 있다.
인고를 견디며 살아온 진도의 눈물 홍주
술 빚는 일을 계속하는 것은 남편이 죽은 뒤 아들의 사업 실패로 살림이 어려워졌고 손자들을 돌봐야 하기 때문이다. 전통은 생계를 통해 이어진다. 누룩은 밀누룩을 쓴다. 오일장날 장에서 사온다. 홍주를 내리기 위해서는 먼저 원주인 막걸리를 만든다. 증류주는 고리로 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은 원주가 좋아야 한다. 한 번에 2말짜리 7솥(14말) 분량의 막걸리를 만든다. 2말짜리 막걸리 1솥을 증류하면 많이 나올 때는 4되, 적게 나오면 3.5되쯤 나온다. 막걸리를 만들려면 먼저 4되의 누룩 가루와 가마솥에 쪄서 식힌 3말의 찐보리를 섞어 준다. 누룩과 섞은 보리를 자루에 넣은 다음 볏짚 위에서 7일 정도 띄운다. 7일 뒤면 보리가 아주 딴딴해진다. 누룩 덩어리처럼 ‘꼬실꼬실하니 깡깡하게’ 된다. 보리에는 붉고, 노랗고, 파란색 곰팡이가 골고루 핀다. 그래야 잘 띄워진 것이다. 한 가지 색만 나오면 썩어버린 것이다.
누룩이 잘 띄워지면 술통에 물을 부은 뒤 보리누룩 덩어리를 넣고 밑술을 만든다. 여름철에는 ‘버글버글’ 끓기 시작해 5일 정도면 잘 삭아서 푹 풀린다. 5일 후에는 찹쌀 3말을 물에 담가 뒀다가 시루에 찐 뒤 술통에 넣는다. 그대로 10일 정도를 다시 발효시킨다. 찹쌀까지 발효가 되면 식혜처럼 쌀알이 동동 뜬다. 잘 익은 막걸리를 건더기까지 솥에다 넣고 소줏고리를 올린다. 고리 위에는 찬물을 번갈아가며 부어 주면서 장작불을 때 끓인다. 가마솥의 뜨거운 술이 끓으면 증기가 위의 찬물에 부딪치면서 술방울이 고리를 통해 내려온다. 술방울이 떨어지는 주둥이 아래 작은 오가리에 두 손 가득한 분량의 지초를 거름망에 담아 두면 술방울이 지초를 통과하며 붉은 색을 우려낸다. 고되고 지난한 과정을 거친 이슬 같은 술방울이 방울방울 모여 붉은 빛 홍주가 탄생한다. 홍주는 마치 오랜 세월, 인고를 견디며 살아온 진도의 눈물 같다. 홍보석 같은 수제 찹쌀 홍주 한 잔을 마시니 더없이 부드럽다. 비로소 여행자의 몸도 마음도 풀어진다. 역사를 보는 새로운 눈을 뜨고 역사가 빚은 붉은 술 한 잔을 찾아 떠나는 진도 여행. 이보다 더 뜻 깊은 여행이 또 있을까!
강제윤 시인은
강제윤 시인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 답사 공동체 인문학습원인 섬학교 교장이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통영은 맛있다》《섬을 걷다》 《바다의 노스텔지어, 파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