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혁신성장과 그 적들
문재인 정부가 경제정책의 한 축을 혁신성장으로 설정했지만 성과는 저조하다는 비판이 분출하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문가와 일반 국민 모두 경제정책 중 혁신성장이 가장 부진하다고 평가했다. 혁신성장의 속도가 더디다는 대통령 지적에 정부는 혁신성장본부를 출범시켰고, 지난 18일 발표한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에서도 ‘핵심 규제 개선, 투자 지원, 미래 먹거리 창출 등 혁신성장 가속화’를 강조했다. 어떤 장애물을 넘어야 혁신성장에서 체감 가능한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세계문명사 연구에 큰 족적을 남기고 2015년 타계한 패트리샤 크론 미국 프린스턴고등연구원 교수의 연구를 집약한 책 《산업화 이전의 세계》를 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200여 쪽의 이 책에는 ‘코리아’가 여러 번 등장한다. 세종대왕의 많은 업적과 함께 한글이 언급되는데,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발명과 혁신이 기득권의 저항으로 그 잠재력을 꽃피우지 못한 전형적인 경우로 다뤄진다. 누구나 쉽게 배워 사용할 수 있는 한글이 사대사상에 사로잡혀 한문을 고수하는 지배층의 저항으로 ‘언문(저속한 글)’ ‘아녀자의 글’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혁신은 본질적으로 기존의 것, 현상의 파괴에서 발단하기 때문에 ‘손해’를 초래하고, 따라서 혁신에 대한 기득권의 저항은 일상적으로 발생한다. 산업혁명 초기엔 기계의 등장으로 일자리를 상실할 위기에 처한 노동자들의 기계파괴 운동이 일어났다. 자동차 생산라인에 신공정 도입을 반대하는 노동조합도 같은 맥락이다. 한글은 위로부터의 저항이었지만 기계파괴 운동은 아래로부터, 즉 노동의 저항이었다. 신규 진입을 방해하는 독과점 기업의 시장지배력은 자본의 저항으로 나타난다.

현재 혁신성장정책은 전방위적 저항에 직면해 있다. 인터넷전문은행과 관련해 은산분리를 완화하고자 하지만 시민단체뿐 아니라 기존 은행의 암묵적 반대에 직면해 있다. 많은 규제가 담당부처, 직역단체, 소비자 등의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데, 이를 극복하지 못해 규제 개혁은 진전하지 못하고 있다. 원격의료는 취약계층에 대한 의료서비스의 질을 높일 수 있지만 의료계와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디지털혁명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데이터 활용을 위해서는 개인정보 보호와 산업적 활용 사이에서 새로운 접점을 찾아내야 하는데 법제화는 아득하다.

이 난국을 타파하기 위해선 국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비전이 제시돼야 한다. 지금은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다음 세대, 국가 전체가 더 잘살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비전이 제시된다면 국민적 합의는 보다 쉽게 이뤄질 것이다. 그 비전은 경제적 혁신과 사회적 포용을 함께 담아야 한다. 혁신성장으로 경제의 파이를 키우되, 성장의 과실이 모두에게 돌아가도록 제도를 설계하고 구체적인 정책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예컨대 대규모 스마트팜을 실행할 때 전문 기업과 개별 농가가 함께하는 방식이라면 혁신과 포용을 동시에 실현할 수 있다.

경제발전 전략으로서의 혁신성장은 경제사회 전반의 전환이 요구되는 장기적 국가 과제다. 경제사회 각 영역에서 제도와 시스템 전환이 이뤄지면서 장기간에 걸쳐 실현된다. 규제 혁신은 성과를 조기에 낼 수 있는 최우선 과제다. 이와 함께 공급, 수요, 인재, 조직 혁신이 수반돼야 혁신성장의 잠재력이 만개한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많은 혁신을 이뤄냈다. 이를 통해 새로운 기업과 일자리가 등장했고 삶은 풍족해졌다. 현재 세계 경제는 디지털 전환기에 있다. 혁신과 포용으로 전환기의 기회를 살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