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칼럼] 600조원 '절대반지' 유혹에서 벗어나길
캘퍼스(CalPERS)라는 연기금이 있다. 캘리포니아 공무원, 공공기관 종사자들에게 은퇴연금을 제공하는 미국 최대이자 세계 여섯 번째 연기금이다. 규모도 규모지만 무엇보다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통한 공격적인 투자로 명성이 자자하다. 스튜어드십 코드라는 말이 나오기 훨씬 전인 1980년대 말부터 주주권 행사에 나서 IBM, GM 등 무수한 거대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을 몰아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지배구조가 독립적이라는 이 연금에서 벌어진 희한한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2004년의 일이다. 이사회가 회장을 표결로 내쫓은 사건이다. 슈퍼마켓 노조 대의원인 션 해리건을 회장에 앉힌 건 그레이 데이비스 주지사였다. 민주당 소속인 그는 노조 덕분에 당선되자 연금 지급액을 20~50% 올렸다. 고속도로순찰대에게는 50세가 넘어 은퇴하면 마지막 연봉의 90%를 연금으로 지급하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연금운용위원 13명 모두를 노조와 민주당 출신으로 물갈이했다. 캘퍼스가 조직적 노조운동의 본산이 돼 갔다. 월트디즈니의 마이클 아이즈너 회장 등이 줄줄이 희생양이 됐다. 논란은 커졌다. 슈퍼마켓 기업인 세이프웨이의 CEO를 몰아내려던 시도에는 해리건의 개인 감정까지 개입됐다. 동료 이사들이 나섰다. “연금이 어째 당신 것인가?” 해임을 결의한 이사들의 볼멘 목소리였다.

세계 최대 연기금은 일본의 연금적립금관리운용독립행정법인(GPIF)이다. 1300조원이 넘는 적립금을 운용한다. 기존 지배구조로는 정권의 거수기 노릇밖에 할 수 없다며 독립적 운용을 목표로 2006년 설립됐지만 하수인 역할은 여전하다.

2014년이다. GPIF는 주식투자 비중을 24%에서 50%로 늘렸다. 채권 중심의 운용을 다양화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아베노믹스의 성공을 뒷받침하기 위한 주가 부양이 목표였다. 마이너스 운용수익률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뿐이 아니다. 아베 총리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직후 열린 정상회담에서 미국 인프라 건설에 투자해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되겠다고 약속하자 선뜻 박자를 맞추고 나선 곳이 GPIF다.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해야 한다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벤치마킹 대상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던 연기금들이다. 연금사회주의가 걱정된다면 GPIF처럼 의결권 자문까지 민간에 넘기면 되고, 캘퍼스처럼 지배구조를 투명하게 만들면 된다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모두가 헛소리다. 캐나다처럼 연기금의 독립성 확보에 성공한 나라도 있긴 있다. 하지만 드문 사례다. 한국보다 훨씬 투명하다는 일본과 미국이 이 정도다.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는가.

정치권은 스튜어드십 코드 시행을 눈앞에 뒀다는 지금도 국민연금을 조몰락거리느라 분주하다. 보건복지부 장관은 대한항공에 대한 국민연금의 경영권 개입을 제안해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국민연금은 KB금융 주주총회에서 정부 입맛에 맞춰 노동이사제에 찬성한 것이 얼마 전이다. 며칠 전엔 한국전력이 낙하산 인사를 상임감사위원에 앉히려다 국제 의결권자문기관의 반대에 부딪히자 연기금에 지원을 요청했다. 한전은 ‘자가발전’이라고 해명했지만 그게 한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국민연금은 국내 시가총액의 7%를 보유한 큰손이다. 국민연금만 장악하면 모든 기업이 손안에 들어온다. 정부가 원하는 것이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정치적 욕심은 결코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기금 운용이나 주주권 행사부터 다른 자산운용사에 맡기는 것이 급선무다.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이 진정 2200만 명 가입자들의 노후를 위한 것이라면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어정쩡한 독립성 부여가 오히려 개입을 정당화시켜 줄 수 있어서다. 국민연금 지배구조와 운용 방식을 완전히 뜯어고쳐야 하는 이유다. 연금을 쪼개 경쟁시키거나 민영화해 정치권력의 손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국가재정법은 연기금의 의결권이 기금의 이익을 위해 신의성실하게 행사돼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민연금이 가입자들의 청지기가 아니라 정권의 청지기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600조원의 거대 기금에 유혹받지 않을 권력은 없다. 정치권이 그 ‘절대반지’의 유혹에서 벗어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