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배 뛰었다가 폭락한 '60년대 작전주'… 그 뒤엔 중앙정보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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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본시장을 뒤흔든 사건
(2) 1962년 5월 증권 파동
대한증권거래소 발행 주식
증권거래법 공포 전후 폭등
"사두면 팔자 고친다" 개미 몰려
결과는 1년 뒤 70분의 1토막
정치자금 급했던 중앙정보부
증권사와 결탁해 시세조종한 탓
거래소는 긴급자금 투입 등
수습 나섰지만 역부족
자본시장 키우려던 군사정권
주식 태동기 되레 불신 키워
1970년대 상장 촉진 전까지
주식시장 사실상 '개점휴업'
(2) 1962년 5월 증권 파동
대한증권거래소 발행 주식
증권거래법 공포 전후 폭등
"사두면 팔자 고친다" 개미 몰려
결과는 1년 뒤 70분의 1토막
정치자금 급했던 중앙정보부
증권사와 결탁해 시세조종한 탓
거래소는 긴급자금 투입 등
수습 나섰지만 역부족
자본시장 키우려던 군사정권
주식 태동기 되레 불신 키워
1970년대 상장 촉진 전까지
주식시장 사실상 '개점휴업'
“6개월 만에 80배나 올랐대요. 사두면 팔자 고친다던데….”
5·16 군사정변 1주년을 넘긴 1962년 5월25일. 짙은 어둠이 가시지 않은 서울 명동 은행가에 정장 차림의 사내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야간통행금지 해제 시간인 새벽 4시부터 ‘대증주(大證株)’ 유상증자에 청약하러 나온 개인투자자들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꺼낸 시세 얘기는 동틀 무렵까지 이어졌다. 아직 굳게 닫힌 은행 문을 아침 햇살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대한증권거래소 발행주식을 뜻하는 대증주는 당시 ‘증권족’으로 불리며 명동을 드나들던 투자자들에게 꿈의 블루칩이었다. 박정희 의장이 이끄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1961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일환으로 자본시장 육성을 천명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가격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자본시장 구심점을 장악하려는 증권회사들의 매점(買占) 전략에 극심한 품귀 현상까지 빚어졌다. 거래소가 시세보다 싸게 신주를 공모하자 논밭을 팔아 은행을 찾는 행렬이 이어졌다.
해방 1세대 ‘개미’들의 장밋빛 꿈은 그로부터 1년 뒤 70분의 1토막이라는 처참한 종말을 맞는다. 같은 기간 거래소는 대증주 가격을 부풀렸던 증권사들의 결제불이행으로 다섯 차례나 휴장하는 파행을 거듭했다. 패가망신한 증권족의 흉문(凶聞)이 들불처럼 번져나갈 때 또 하나의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창당 자금 마련에 혈안이 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가 증권사들과 야합해 시세조종 ‘책동전(작전)’에 개입했다는 수사 결과였다. 박정희 군사정권 초기 ‘4대 의혹 사건’의 몸통으로 5300여 명의 청약자를 파국으로 몰고 간 ‘증권파동’의 전말이었다.
◆80배 ‘광등(狂騰)’
대증주 가격이 꿈틀대기 시작한 것은 1962년 1월 증권거래법 공포를 수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자본시장 활성화를 위해 제정한 이 법은 ‘거래소를 주식회사로 전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법령에 기초한 ‘영단제(營團制) 특수법인’에 본격적인 영리 추구를 허용하는 중대 변화이자 비극의 씨앗이었다.
자본시장 성장의 수혜를 한몸에 받을 것이란 기대는 이전까지 액면가(50전) 아래서 힘을 못 쓰던 대증주 시세에 ‘날개’를 달았다. 1961년 11월 주당 50전을 뛰어넘더니 이듬해 1월 법 통과 직후 1환(1환=100전)을 돌파했다. 3월엔 9환대로 치솟았고 4월엔 액면가의 무려 80배를 웃도는 최고 42환대까지 폭등했다.
대증주 투자로 하루아침에 돈방석에 앉았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전국을 휩쓸었다. 불과 10개 남짓한 종목을 거래하는 주식시장은 끓는 가마솥으로 변했다. 한국전력과 한국증권금융회사 주식이 ‘광등’에 동참했고 거래대금(약정대금)은 매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1962년 5월 거래소의 한 달 거래대금은 무려 2520억환(쌀값으로 환산한 현재가치 약 2조원)으로 치솟았다. 1956년 거래소 개설 이후 전년도까지 6년간
적 거래대금과 맞먹었다.
거래 폭증의 불똥은 엉뚱하게도 ‘잔칫집’ 거래소의 현금 창고로 튀었다. 당시 거래는 익일 결제가 원칙이었지만 이연료만 내면 대금 납입을 최장 두 달까지 늦출 수 있었다. 결제 이연이 늘면서 매도자에게 현금을 임시 지급해야 하는 거래소가 갑작스러운 유동성 위기에 내몰린 것이다. 혼비백산한 거래소는 80억 주의 대규모 유상증자 계획을 전격 발표했다. 이 중 9억9000만 주는 5월25~29일 일반에 공모하기로 결의했다. 위험천만한 ‘폭탄 돌리기’에 서민을 끌어들이는 일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돈벌이에 눈이 먼 거래소와 주주사(증권사)들은 귀를 닫아버렸다.
◆증권시장의 마비
“딱 딱 딱.”
대증주 거래량이 정점에 달했던 1962년 5월 거래소 입회장. 시장담당 직원이 거래 시작을 알리는 ‘딱딱이’를 내리치자 입회 대리인들의 고함 소리가 강당을 뒤흔들었다. 머리 위로 치켜든 수십 개의 손가락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대증주 매물을 홍수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숨 쉴 틈 없이 손가락을 접었다 펴며 물량을 받아내던 일흥증권 대리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결국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현장에 있던 100여 명의 대리인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직감했다.
일흥증권은 통일, 동명증권 등과 함께 거래소 지분 과반을 확보한 매점 세력이었다. 유상증자 청약 기간에도 시세를 떠받치기 위해 매수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금이 바닥났다’는 첩보를 입수한 경쟁사들이 연일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입회장 실신 사건은 매도세력이 벌인 ‘대역전극’의 절정이었던 셈이다. 결국 5월31일, 대증주를 모두 집어삼킬 것처럼 매물을 받고 또 받던 세 증권사는 결제대금 580억환 가운데 무려 352억환을 마련하지 못해 무릎을 꿇고 말았다.
사태 수습에 나선 거래소는 정부의 긴급자금을
혈받아 5월 결제를 완료하고, 6월분은 전면 ‘해합(쌍방 합의로 매매계약 해지)’이란 비상수단으로 틀어막았다. 하지만 눈덩이처럼 커지는 혼란과 불신을 해소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거래소는 사태 수습과 화폐개혁(10환→1원) 조치 명목으로 두 차례 휴장을 거쳐 7월13일 문을 열었지만 8월 말 또다시 터진 태양증권의 결제불이행 사태로 문을 닫았다. 그해 말에도 증시 안정을 명목으로 폐장과 재개장을 반복하더니 1963년 2월25일부터는 무려 73일 동안 문을 닫았다. 대증주 폭락 항의 집회와 이사장실 난입 등으로 이미 정상 운영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역대 최장기 휴장을 끝낸 1963년 5월9일. 만신창이가 된 거래소는 공신력 회복을 위해 공영제로 변신해 다시 문을 열었다. 껍데기만 남은 거래소의 개장 당일 주가는 2전2리. 1년 전 액면가의 29배인 주당 14환50전(6월10일 화폐개혁 후 1원45전)에 신주를 청약한 투자자들의 자산 98%가 허공으로 사라진 뒤였다.
◆드러난 실체
1963년 3월. 김재춘 3대 중앙정보부장이 이끄는 특별조사단은 증권파동의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특조단에 따르면 사건은 1962년 1월 김종필 초대 중앙정보부장 휘하의 강성원 조사실 행정관(소령)과 윤응상 일흥증권 사장 간 만남에서 출발했다. 당시 ‘투자의 귀재’로 불리던 윤씨는 ‘농협중앙회 소유 한국전력 주식을 빌려주면 이를 크게 불려주겠다’며 증시 문외한이었던 중앙정보부를 꼬드겼다. 이후 한전 주가를 끌어올린 뒤 내다팔아 폭리를 취했고, 이 돈을 다시 대증주 매점에 써 일대 소동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다는 게 특조단이 파악한 증권파동의 실체였다.
특조단은 윤씨와 정보부 요원들을 포함해 재무부 장관, 거래소 이사장, 농협중앙회장 등 10여 명을 구속했다. 그러나 3개월 뒤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는 피고인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사태를 황급히
듭지었다. 재판부는 “증시 육성을 위한 충정에서 벌어진 일로, 특정인이 불법적으로 이득을 취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두 달 뒤인 8월 박정희 의장은 공화당을 창설해 총재에 올랐고 10월 대선에서 46.7% 득표율로 제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제3공화국의 탄생이었다.
이듬해인 1964년 야당은 군사정권의 정치자금 조달을 둘러싼 ‘4대 의혹사건(증권파동, 워커힐, 새나라자동차, 빠징꼬 사건)’을 파헤치기 위한 국정감사를 벌여 새로운 의혹들을 제기했다. 윤씨가 중앙정보부로부터 9억환을 받아 460억환의 부당이득을 챙겼고 이 중 67억환이 다시 중앙정보부로 흘러들어갔다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거대 자금의 행방은 대부분 베일에 싸여 있다.
◆태동기 증시의 일장춘몽
군사정권 초기 자본시장에 불을 지피려던 계획은 결국 갖은 의혹과 수많은 피해자만 남긴 ‘일장춘몽’으로 끝났다. 중앙정보부의 시세조종 개입은 태동기 주식시장에 강한 불신을 불러일으켰고, 거래소는 1965년까지 3년 동안 단 하나의 기업공개(IPO)도 유치하지 못하는 개점휴업 상태를 이어갔다. 증권파동에 휘말려 외유생활을 떠났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생전 증언록에서 “보고를 받진 못했지만 개입 부서의 장으로서 도의적 책임을 느낀다”고 했다.
한국 주식시장이 활기를 되찾은 것은 1970년대 기업공개 촉진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면서부터다. 거래소는 명동에서의 ‘뼈아픈 과거’를 뒤로하고 1979년 여의도에 새 둥지를 틀었다. 1988년엔 정부 지분을 다시 증권사 등에 넘겨 회원제 민영기관으로 탈바꿈했고, 2005년 코스닥시장과 선물거래소 등을 통합해 지금의 한국거래소로 거듭났다. 2017년 말 현재 상장 종목 총 2040개, 시가총액은 1889조원의 세계 13위 규모 거래소로 성장했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
5·16 군사정변 1주년을 넘긴 1962년 5월25일. 짙은 어둠이 가시지 않은 서울 명동 은행가에 정장 차림의 사내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야간통행금지 해제 시간인 새벽 4시부터 ‘대증주(大證株)’ 유상증자에 청약하러 나온 개인투자자들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꺼낸 시세 얘기는 동틀 무렵까지 이어졌다. 아직 굳게 닫힌 은행 문을 아침 햇살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대한증권거래소 발행주식을 뜻하는 대증주는 당시 ‘증권족’으로 불리며 명동을 드나들던 투자자들에게 꿈의 블루칩이었다. 박정희 의장이 이끄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1961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일환으로 자본시장 육성을 천명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가격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자본시장 구심점을 장악하려는 증권회사들의 매점(買占) 전략에 극심한 품귀 현상까지 빚어졌다. 거래소가 시세보다 싸게 신주를 공모하자 논밭을 팔아 은행을 찾는 행렬이 이어졌다.
해방 1세대 ‘개미’들의 장밋빛 꿈은 그로부터 1년 뒤 70분의 1토막이라는 처참한 종말을 맞는다. 같은 기간 거래소는 대증주 가격을 부풀렸던 증권사들의 결제불이행으로 다섯 차례나 휴장하는 파행을 거듭했다. 패가망신한 증권족의 흉문(凶聞)이 들불처럼 번져나갈 때 또 하나의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창당 자금 마련에 혈안이 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가 증권사들과 야합해 시세조종 ‘책동전(작전)’에 개입했다는 수사 결과였다. 박정희 군사정권 초기 ‘4대 의혹 사건’의 몸통으로 5300여 명의 청약자를 파국으로 몰고 간 ‘증권파동’의 전말이었다.
◆80배 ‘광등(狂騰)’
대증주 가격이 꿈틀대기 시작한 것은 1962년 1월 증권거래법 공포를 수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자본시장 활성화를 위해 제정한 이 법은 ‘거래소를 주식회사로 전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법령에 기초한 ‘영단제(營團制) 특수법인’에 본격적인 영리 추구를 허용하는 중대 변화이자 비극의 씨앗이었다.
자본시장 성장의 수혜를 한몸에 받을 것이란 기대는 이전까지 액면가(50전) 아래서 힘을 못 쓰던 대증주 시세에 ‘날개’를 달았다. 1961년 11월 주당 50전을 뛰어넘더니 이듬해 1월 법 통과 직후 1환(1환=100전)을 돌파했다. 3월엔 9환대로 치솟았고 4월엔 액면가의 무려 80배를 웃도는 최고 42환대까지 폭등했다.
대증주 투자로 하루아침에 돈방석에 앉았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전국을 휩쓸었다. 불과 10개 남짓한 종목을 거래하는 주식시장은 끓는 가마솥으로 변했다. 한국전력과 한국증권금융회사 주식이 ‘광등’에 동참했고 거래대금(약정대금)은 매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1962년 5월 거래소의 한 달 거래대금은 무려 2520억환(쌀값으로 환산한 현재가치 약 2조원)으로 치솟았다. 1956년 거래소 개설 이후 전년도까지 6년간
적 거래대금과 맞먹었다.
거래 폭증의 불똥은 엉뚱하게도 ‘잔칫집’ 거래소의 현금 창고로 튀었다. 당시 거래는 익일 결제가 원칙이었지만 이연료만 내면 대금 납입을 최장 두 달까지 늦출 수 있었다. 결제 이연이 늘면서 매도자에게 현금을 임시 지급해야 하는 거래소가 갑작스러운 유동성 위기에 내몰린 것이다. 혼비백산한 거래소는 80억 주의 대규모 유상증자 계획을 전격 발표했다. 이 중 9억9000만 주는 5월25~29일 일반에 공모하기로 결의했다. 위험천만한 ‘폭탄 돌리기’에 서민을 끌어들이는 일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돈벌이에 눈이 먼 거래소와 주주사(증권사)들은 귀를 닫아버렸다.
◆증권시장의 마비
“딱 딱 딱.”
대증주 거래량이 정점에 달했던 1962년 5월 거래소 입회장. 시장담당 직원이 거래 시작을 알리는 ‘딱딱이’를 내리치자 입회 대리인들의 고함 소리가 강당을 뒤흔들었다. 머리 위로 치켜든 수십 개의 손가락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대증주 매물을 홍수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숨 쉴 틈 없이 손가락을 접었다 펴며 물량을 받아내던 일흥증권 대리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결국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현장에 있던 100여 명의 대리인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직감했다.
일흥증권은 통일, 동명증권 등과 함께 거래소 지분 과반을 확보한 매점 세력이었다. 유상증자 청약 기간에도 시세를 떠받치기 위해 매수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금이 바닥났다’는 첩보를 입수한 경쟁사들이 연일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입회장 실신 사건은 매도세력이 벌인 ‘대역전극’의 절정이었던 셈이다. 결국 5월31일, 대증주를 모두 집어삼킬 것처럼 매물을 받고 또 받던 세 증권사는 결제대금 580억환 가운데 무려 352억환을 마련하지 못해 무릎을 꿇고 말았다.
사태 수습에 나선 거래소는 정부의 긴급자금을
혈받아 5월 결제를 완료하고, 6월분은 전면 ‘해합(쌍방 합의로 매매계약 해지)’이란 비상수단으로 틀어막았다. 하지만 눈덩이처럼 커지는 혼란과 불신을 해소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거래소는 사태 수습과 화폐개혁(10환→1원) 조치 명목으로 두 차례 휴장을 거쳐 7월13일 문을 열었지만 8월 말 또다시 터진 태양증권의 결제불이행 사태로 문을 닫았다. 그해 말에도 증시 안정을 명목으로 폐장과 재개장을 반복하더니 1963년 2월25일부터는 무려 73일 동안 문을 닫았다. 대증주 폭락 항의 집회와 이사장실 난입 등으로 이미 정상 운영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역대 최장기 휴장을 끝낸 1963년 5월9일. 만신창이가 된 거래소는 공신력 회복을 위해 공영제로 변신해 다시 문을 열었다. 껍데기만 남은 거래소의 개장 당일 주가는 2전2리. 1년 전 액면가의 29배인 주당 14환50전(6월10일 화폐개혁 후 1원45전)에 신주를 청약한 투자자들의 자산 98%가 허공으로 사라진 뒤였다.
◆드러난 실체
1963년 3월. 김재춘 3대 중앙정보부장이 이끄는 특별조사단은 증권파동의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특조단에 따르면 사건은 1962년 1월 김종필 초대 중앙정보부장 휘하의 강성원 조사실 행정관(소령)과 윤응상 일흥증권 사장 간 만남에서 출발했다. 당시 ‘투자의 귀재’로 불리던 윤씨는 ‘농협중앙회 소유 한국전력 주식을 빌려주면 이를 크게 불려주겠다’며 증시 문외한이었던 중앙정보부를 꼬드겼다. 이후 한전 주가를 끌어올린 뒤 내다팔아 폭리를 취했고, 이 돈을 다시 대증주 매점에 써 일대 소동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다는 게 특조단이 파악한 증권파동의 실체였다.
특조단은 윤씨와 정보부 요원들을 포함해 재무부 장관, 거래소 이사장, 농협중앙회장 등 10여 명을 구속했다. 그러나 3개월 뒤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는 피고인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사태를 황급히
듭지었다. 재판부는 “증시 육성을 위한 충정에서 벌어진 일로, 특정인이 불법적으로 이득을 취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두 달 뒤인 8월 박정희 의장은 공화당을 창설해 총재에 올랐고 10월 대선에서 46.7% 득표율로 제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제3공화국의 탄생이었다.
이듬해인 1964년 야당은 군사정권의 정치자금 조달을 둘러싼 ‘4대 의혹사건(증권파동, 워커힐, 새나라자동차, 빠징꼬 사건)’을 파헤치기 위한 국정감사를 벌여 새로운 의혹들을 제기했다. 윤씨가 중앙정보부로부터 9억환을 받아 460억환의 부당이득을 챙겼고 이 중 67억환이 다시 중앙정보부로 흘러들어갔다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거대 자금의 행방은 대부분 베일에 싸여 있다.
◆태동기 증시의 일장춘몽
군사정권 초기 자본시장에 불을 지피려던 계획은 결국 갖은 의혹과 수많은 피해자만 남긴 ‘일장춘몽’으로 끝났다. 중앙정보부의 시세조종 개입은 태동기 주식시장에 강한 불신을 불러일으켰고, 거래소는 1965년까지 3년 동안 단 하나의 기업공개(IPO)도 유치하지 못하는 개점휴업 상태를 이어갔다. 증권파동에 휘말려 외유생활을 떠났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생전 증언록에서 “보고를 받진 못했지만 개입 부서의 장으로서 도의적 책임을 느낀다”고 했다.
한국 주식시장이 활기를 되찾은 것은 1970년대 기업공개 촉진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면서부터다. 거래소는 명동에서의 ‘뼈아픈 과거’를 뒤로하고 1979년 여의도에 새 둥지를 틀었다. 1988년엔 정부 지분을 다시 증권사 등에 넘겨 회원제 민영기관으로 탈바꿈했고, 2005년 코스닥시장과 선물거래소 등을 통합해 지금의 한국거래소로 거듭났다. 2017년 말 현재 상장 종목 총 2040개, 시가총액은 1889조원의 세계 13위 규모 거래소로 성장했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