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용 자재상가 밀집 입정동 일대에 주상복합 건립 추진
상인들 "세입자 대책 부족하다" 반발…집적단지 요구
"청계천 일대 확 바뀐다고요? 수십년 전통 도심제조업 어쩌나요"
"보기에는 건물이 낡고 지저분해 보여도 철저한 협업화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쪽에서 기계부품을 깎으면, 저쪽에서 연마하고, 그 옆에서 바로 도장에 들어갑니다.

뿔뿔이 흩어지면 살아남기 어려운 구조인데, 다들 나 몰라라 하네요.

"
지난 1일 오후 청계천변 입정동. 이곳에서 41년간 산업용 고무벨트 상점을 운영해온 유락희(65) 씨가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1층짜리 상가 건물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세운 3-1, 3-4, 3-5구역으로도 불리는 입정동 일대에선 낡은 가게들을 쓸어내고 주상복합 3개동을 짓는 재개발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세운상가 주변 재개발 구역 중 사업 추진 속도가 가장 빠른 곳이다.

세운상가 일대는 2006년 오세훈 전 서울시장 재임 시절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됐으나 글로벌 경제위기가 닥치고, 박원순 서울시장 취임 이후 정책이 바뀌면서 10년 이상 재개발 사업이 진척이 없었다.

입정동 상인들은 수십 년간 이어온 도심 제조업 생태계가 있기 때문에 각자 점포를 옮겨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며 2년째 세입자 대책을 요구하고 있으나, 뚜렷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세운상가 일대가 재개발될 때마다 반복될 문제의 시작인 셈이다.
"청계천 일대 확 바뀐다고요? 수십년 전통 도심제조업 어쩌나요"
"청계천 일대 확 바뀐다고요? 수십년 전통 도심제조업 어쩌나요"
가게를 빌려 영업해온 상인들은 올해 초부터 점포를 비워달라는 요구를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했다.

33년간 누전차단기·계량기 등 전기 관련 물품을 취급해온 박모(62) 사장은 점포를 8월 말까지 비워달라고 적힌 서류를 흔들며 "등기가 법원에서도 오고, 변호사한테도 오고 수시로 와서 이제 우체부가 오면 미안할 정도"라고 말했다.

당초 268개 업체가 있었으나 지금은 150여개가 남았다.

보상금을 받고 옮기거나 건물주에게 떠밀려 비게 된 점포가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은 지난 6월부터다.

입정동은 6·25 전쟁이 끝난 이후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을 취급하는 소규모 상점이 생기며 형성된 상권이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정밀가공(기계부품 가공)을 배운 이들이 이곳에 모여 군락을 형성했고, 이후 기계·공구·고무·전기·조명·소방기자재 등 산업용 제품 전반이 유통되는 도심 제조업 공간이 됐다.

청계천 상권수호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은 유씨는 "산업용 공구 공장은 지방에도 많지만 모두 이곳으로 올라와 재분배된다"며 "각자 흩어져서는 영업을 할 수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관할 구청인 중구청은 재개발 공사 기간 중 상인들이 컨테이너 가설물에서 임시 영업을 하다가 새 건물 지하로 입주하는 방안을 제시한 상태다.

문제는 소음·분진이 발생하는 정밀가공 업체는 입주가 어렵다는 점이다.

중구청 관계자는 "정밀가공은 도심 한복판에 있기에 적합한 시설은 아니다"라며 "구로 등 더 적합한 지역의 공실로 옮기는 게 좋다고 본다"고 말했다.

상인들은 주상복합 지하상가 입주 시 주민들과의 마찰을 우려하며 원래 업무지구로 계획했던 곳에 주상복합 허가를 내준 점도 문제 삼고 있다.

이에 중구청은 사업성이 떨어져 사업 계획이 변경된 것이며, 세운3구역에는 업무·주거·숙박 시설이 모두 허용돼 있으므로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청계천 일대 확 바뀐다고요? 수십년 전통 도심제조업 어쩌나요"
상인들은 세운상가 주변에 도심 제조업 특화단지를 조성해 오래된 점포들을 한곳에 모아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서울시가 '도심 제조업 살리기' 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세운상가 일대 재개발 구역 세입자에 대해선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러는 동안 상가 건물은 더 낡고, 거리는 칙칙해져 행인들의 발걸음도 뜸해졌다.

상인 박 모 씨는 "세입자들이 모두 떠난 건물 외벽의 콘크리트 덩어리가 바닥으로 쿵쿵 떨어진다"며 "조심하면서 다녀야 한다"고 말했다.

고객을 유지하기 위해 인근 점포로 옮기려 해도 임대료 문제가 발목을 잡는다.

입정동에서 12년간 커피숍을 운영해온 한 상인은 "이 일대 점포들이 옮겨야 할 상황이 되자 주변 임대료가 비싸지고, 없던 권리금까지 생겼다"며 "임대료 조건이 맞는 곳을 찾아보다 포기했다"고 말했다.

상인 유씨는 "도소매 위주 옛날 방식 영업을 지속해온 우리에게도 자기반성이 필요하다"며 "무역 등 자기 혁신을 해야 했는데 시대에 미처 따라가지 못한 점이 있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도 "입정동은 후세에 우리나라 정밀가공의 역사를 보여줄 수 있는 곳으로서 보전가치가 충분하다"며 "다 함께 모여 영업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