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할아버지의 '800년 그리움' 묻힌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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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향기
강제윤 시인의 새로 쓰는 '섬 택리지'
<22> 강화 볼음도
저어새가 '분단의 아픔' 어루만져 줄 희소식 전할까?
강제윤 시인의 새로 쓰는 '섬 택리지'
<22> 강화 볼음도
저어새가 '분단의 아픔' 어루만져 줄 희소식 전할까?
역사적인 4·27 남북한 정상회담이 열리던 날 불현듯 볼음도 생각이 났다. 볼음도 은행나무 생각이 났다. 북방한계선(NLL) 안의 섬, 볼음도 은행나무골에 사시는 800살 은행나무 할아버지는 여전히 정정하실까. 오늘도 푸른 잎 피워 올리고 계실까. 뵙고 온 지가 여러 해 흘렀다. 볼음도의 수호신 은행나무 할아버지도 남북 정상회담을 누구보다 기뻐하고 계시지 않을까. 직접 찾아뵙고 여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우물쭈물하다 뒤늦게 행장을 꾸려 강화도로 향했다. 볼음도 은행나무 할아버지의 고향은 북녘 땅이다. 800년 전 어느 날, 피난민처럼 아내 나무를 북녘에 두고 홀로 볼음도로 이주해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다리 생기고 자동차 느는데 사람은 줄어
볼음도행 여객선은 하루 단 두 차례. 오전 9시10분 첫 배를 타기 위한 여행객들로 여객선 터미널은 붐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외포리 부둣가 상가와 식당들은 한적하다. 주말이고 한참 행락철인데 어찌된 일일까. 도로에는 차들이 많은데 수산시장마저도 썰렁하다. 산나물 같은 것들을 팔러 나온 할머니가 궁금증을 풀어 주신다. “다리 놔지고 나서 차는 몇 배 더 다니는데 여기 오는 사람은 확 줄었어요. 자동차 구경만 실컷 합니다. 정신 사나워.” 문제는 다리다. 강화도와 석모도를 연결한 다리가 개통되면서부터 여행객들은 자동차로 외포리를 훌쩍 지나간다. 석모도행 여객선을 타기 위해 북적거리던 포구는 다리 개통과 함께 한적해졌다. 가을에는 그나마 젓갈을 구하러 온 사람들 때문에 활기가 돌지만 다른 철에는 활력을 잃었다. 그렇다면 석모도는 사정이 더 좋아졌을까.
석모도는 2017년 6월 다리 개통 후 관광객은 늘었지만 극심한 교통정체와 주차난에 시달리고 쓰레기 급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게다가 관광객 증가에 따른 이득은 부동산 업자들이나 일부 상인들에게만 돌아갈 뿐 옛 선착장 주변은 관광객 발길이 끊겨 상권이 침체됐다. 관광업에 종사하지 않는 주민들 대다수도 이익은 고사하고 교통난에 고통받고 있다. 강화와 불과 10분 거리로 가깝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수시로 배가 다니던 석모도는 교통 불편이랄 게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다리 공사를 한 것은 과연 올바른 선택이었을까. 의문은 끊이지 않는데 한 시간 남짓 운항 끝에 여객선이 볼음도에 기항한다. 주민 284명인 NLL 안에 있는 섬
볼음도 선착장 대합실 옆에는 확 들어오는 입간판이 하나 서 있다. 저어새가 들려주는 볼음도 이야기. 볼음도의 역사와 전설, 생태 이야기를 그림과 글로 설명해 주고 있는데, 쉽고 위트가 있어 간판 앞을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 신선봉 선녀탕의 물이 마르게 된 이야기 앞에서는 빙그레 미소가 지어진다. 신선이 살았다는 신선봉 정상에는 선녀탕이란 연못이 있었는데, 늘 하늘의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해부턴가 선녀탕 물이 말라 버렸다. 볼음도 마을의 아낙이 선녀탕에서 빨래를 해 더러워진 탓이다. 그 아낙은 왜 산꼭대기까지 올라가 빨래를 했을까. 그림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 가정을 위해 너희(선녀)들은 사라져 줘야겠다.”
볼음도는 NLL 안에 있는 섬인지라 선착장 입구에 군인들이 나와 인적사항을 기록하고 방문 목적을 물은 뒤 방문증을 나눠준다.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지만 여전히 분단은 현재 진행형이다. 볼음도는 두 개의 마을이 있는데 선착장에서 가까운 큰 마을이 당아촌이다. 마을 앞에 마을의 신전인 당산이 있다. 그 당산 아래 있다 해서 당아촌이다. 또 한 마을은 800살 은행나무 어르신이 굽어 살피고 있는 작은 마을, 내촌이다. 은행나무가 있어서 은행나무골, 은행촌이라고도 부른다. 볼음도는 면적 6.57㎢, 해안선 길이 16㎞의 작은 섬이다. 한때는 초등학생 수만 280명이나 됐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전체 주민이 284명이다. 그 또한 대부분이 노인이다. 두 마을의 중간 쯤에 초등학교와 중학교 분교도 폐교가 돼 잡초만 무성하다. 임경업 장군의 전설 깃든 곳
섬은 조선시대에는 교동군에 속했다가 1914년 경기 강화군에, 1995년 인천시에 편입됐다. 섬을 둘러싸고 평양금이산, 요옥산, 앞남산, 신선봉 등이 있고 그 안에 마을과 농토가 있다. 이 섬 역시 서해바다 ‘조기의 신’인 임경업 장군 전설이 전해진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힌 왕자를 구하러 가던 임경업 장군이 풍랑을 피해 볼음도에 들어왔는데 마침 보름달이 떠 있어서 볼음도라 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전설은 아마도 이 근처 바다가 연평바다처럼 조기 어장이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지 싶다. 볼음도 옆의 아주 작은 섬 아차도에서도 조기 파시가 열렸다. 지금은 40여 명이 살고 면적 0.67㎢에 불과한 아차도가 조기 파시 때면 1000명이 넘게 살았고, 처마 밑으로만 다녀도 비를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집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볼음도에도 어업이 번성했고 임경업 장군을 받들었다. 볼음도에도 기생집이 있을 정도로 흥청거렸다. 지금은 NLL 안이라 어로행위가 자유롭지 못해 어로를 하는 가구는 적다. 큰 배 1척, 작은 배 2척뿐이다. 그래서 주민들 다수는 배 없이 조수간만의 차가 큰 갯벌에 건강망(개막이 그물)을 설치해 밴댕이 같은 물고기를 잡는다. 또 갯벌에서는 상합(백합), 가무락(모시조개), 소라 등을 키워 소득을 올린다. 이 갯벌이 천연기념물 419호인 저어새 번식지이기도 하다. 저어새 보호 때문에 주민과 정부 간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한다. 섬이지만 볼음도의 주업은 농사다.
갯벌을 간척해 논을 만든 까닭에 가구당 평균 경작 면적이 3만3000㎡가 넘는다. 섬은 오랜 옛날부터 나지막한 모래밭에 나무를 심어 방풍림을 조성했다. 그래서 섬 안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이 방풍림과 산들이 바닷바람을 막아 줘 섬은 분지처럼 아늑하고 벼는 해풍의 피해를 입지 않고 튼튼하게 자란다. 섬에는 강화도의 트레일인 나들길 13구간이 13㎞ 남짓 조성돼 있어 걷기에도 좋다.
큰 마을과 폐교를 지나 내촌에 이르면 바닷가 저수지 옆에 은행나무 어르신이 우뚝 서 계신다. 볼음도 은행나무는 수령 800년, 줄기 둘레 8m, 밑동 둘레 9.7m, 키 25m. 천연기념물 304호다. 이 나무는 원래 북녘 땅에 살던 것이다. 고려시대 지금의 황해남도 연안군 호남리 호남중학교 운동장 자리에 암수 두 그루 은행나무가 살았는데, 어느 여름 홍수에 수나무가 뿌리 뽑혀 볼음도 바다로 떠내려 온 것을 주민들이 건져내 다시 심었다고 전해진다. 볼음도에서 연안까지는 불과 8㎞. 볼음도 주민들은 호남리 주민들에게 연락해 그 나무가 호남리에서 떠내려온 수나무인 것을 확인했다.
은행나무 생일상 의례 복원 제안
매년 정월 초 풍어제를 지낼 때면 볼음도와 호남리 어부들은 서로 날짜를 맞춰 생일을 지내주기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헤어진 두 은행나무 부부의 슬픔을 달래준 것이다. 은행나무는 한여름 무더위에 시달리던 섬 주민들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찜통 같은 더위에도 은행나무 그늘 아래만 들어가면 냉기가 돌 정도로 서늘했다. 열대야 같은 밤이면 주민들이 은행나무 그늘에 모여 잠을 청했다. 바닥에 거적을 깔고 삼사십 명의 어른들이 시원하게 잠 잘 때 아이들 열댓 명은 은행나무로 올라가 저마다 가지 사이에 자리 잡고 잠을 청했다. 나무와 한 몸이 된 아이들. 당시 풍경을 떠올려 보니 동화 속 세상 같다. 영화 아바타의 한 장면처럼 또 이중섭의 그림 속 아이들처럼 신비로운 모습들, 생각만으로도 세상이 다 환해진다.
하지만 수백 년을 이어오던 남북의 은행나무를 만나게 해 주던 행사는 6·25전쟁 이후 두 지역이 남북으로 갈리면서 중단됐다. 그 후 볼음도의 수나무는 시름시름 앓더니 점차 말라가기 시작했다. 섬 주민들은 연안에 사는 암나무의 안부를 알 길이 없어지자 수나무가 죽어가는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 1980년대 들어 은행나무 근처에 저수지가 만들어져 해수가 차단되자 볼음도 은행나무는 다시 살아나 푸르름을 되찾게 됐다. 들리는 풍문에는 북한의 암나무도 합동 풍어제가 중단된 후 시름시름 앓았는데 근래 호남중학교 교직원들의 보살핌을 받아 생기를 되찾았다고 한다. 호남리 은행나무도 북한의 천연기념물 165호로 보호받고 있다.
남북 정상이 합의한 ‘판문점 선언’은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 완화와 일체의 적대 행위를 멈추기로 했다. 구체적 실행 조치의 하나가 서해 NLL 평화수역화다. 서해 NLL은 휴전 상태에서 남북 간 교전이 수시로 빚어졌던 한반도의 화약고였다. 그런 NLL 일대를 평화수역으로 만들어 우발적 군사 충돌을 방지하고 안전한 어로활동도 보장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나그네가 일하는 (사)섬연구소에서는 NLL에 깃든 긴장을 풀고 남북 평화를 염원하는 뜻에서 문화재청에 볼음도 은행나무 생일상 의례 복원을 제안했다. 그리고 마침내 칠월 칠석날인 오는 17일 볼음도 은행나무 아래서 생일상 차리기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이제 볼음도 은행나무는 평화의 나무, 평화의 수호신으로 세상에 우뚝 설 것이다.
강제윤 시인은
강제윤 시인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 답사 공동체 인문학습원인 섬학교 교장이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통영은 맛있다》 《섬을 걷다》 《바다의 노스텔지어, 파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볼음도행 여객선은 하루 단 두 차례. 오전 9시10분 첫 배를 타기 위한 여행객들로 여객선 터미널은 붐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외포리 부둣가 상가와 식당들은 한적하다. 주말이고 한참 행락철인데 어찌된 일일까. 도로에는 차들이 많은데 수산시장마저도 썰렁하다. 산나물 같은 것들을 팔러 나온 할머니가 궁금증을 풀어 주신다. “다리 놔지고 나서 차는 몇 배 더 다니는데 여기 오는 사람은 확 줄었어요. 자동차 구경만 실컷 합니다. 정신 사나워.” 문제는 다리다. 강화도와 석모도를 연결한 다리가 개통되면서부터 여행객들은 자동차로 외포리를 훌쩍 지나간다. 석모도행 여객선을 타기 위해 북적거리던 포구는 다리 개통과 함께 한적해졌다. 가을에는 그나마 젓갈을 구하러 온 사람들 때문에 활기가 돌지만 다른 철에는 활력을 잃었다. 그렇다면 석모도는 사정이 더 좋아졌을까.
석모도는 2017년 6월 다리 개통 후 관광객은 늘었지만 극심한 교통정체와 주차난에 시달리고 쓰레기 급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게다가 관광객 증가에 따른 이득은 부동산 업자들이나 일부 상인들에게만 돌아갈 뿐 옛 선착장 주변은 관광객 발길이 끊겨 상권이 침체됐다. 관광업에 종사하지 않는 주민들 대다수도 이익은 고사하고 교통난에 고통받고 있다. 강화와 불과 10분 거리로 가깝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수시로 배가 다니던 석모도는 교통 불편이랄 게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다리 공사를 한 것은 과연 올바른 선택이었을까. 의문은 끊이지 않는데 한 시간 남짓 운항 끝에 여객선이 볼음도에 기항한다. 주민 284명인 NLL 안에 있는 섬
볼음도 선착장 대합실 옆에는 확 들어오는 입간판이 하나 서 있다. 저어새가 들려주는 볼음도 이야기. 볼음도의 역사와 전설, 생태 이야기를 그림과 글로 설명해 주고 있는데, 쉽고 위트가 있어 간판 앞을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 신선봉 선녀탕의 물이 마르게 된 이야기 앞에서는 빙그레 미소가 지어진다. 신선이 살았다는 신선봉 정상에는 선녀탕이란 연못이 있었는데, 늘 하늘의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해부턴가 선녀탕 물이 말라 버렸다. 볼음도 마을의 아낙이 선녀탕에서 빨래를 해 더러워진 탓이다. 그 아낙은 왜 산꼭대기까지 올라가 빨래를 했을까. 그림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 가정을 위해 너희(선녀)들은 사라져 줘야겠다.”
볼음도는 NLL 안에 있는 섬인지라 선착장 입구에 군인들이 나와 인적사항을 기록하고 방문 목적을 물은 뒤 방문증을 나눠준다.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지만 여전히 분단은 현재 진행형이다. 볼음도는 두 개의 마을이 있는데 선착장에서 가까운 큰 마을이 당아촌이다. 마을 앞에 마을의 신전인 당산이 있다. 그 당산 아래 있다 해서 당아촌이다. 또 한 마을은 800살 은행나무 어르신이 굽어 살피고 있는 작은 마을, 내촌이다. 은행나무가 있어서 은행나무골, 은행촌이라고도 부른다. 볼음도는 면적 6.57㎢, 해안선 길이 16㎞의 작은 섬이다. 한때는 초등학생 수만 280명이나 됐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전체 주민이 284명이다. 그 또한 대부분이 노인이다. 두 마을의 중간 쯤에 초등학교와 중학교 분교도 폐교가 돼 잡초만 무성하다. 임경업 장군의 전설 깃든 곳
섬은 조선시대에는 교동군에 속했다가 1914년 경기 강화군에, 1995년 인천시에 편입됐다. 섬을 둘러싸고 평양금이산, 요옥산, 앞남산, 신선봉 등이 있고 그 안에 마을과 농토가 있다. 이 섬 역시 서해바다 ‘조기의 신’인 임경업 장군 전설이 전해진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힌 왕자를 구하러 가던 임경업 장군이 풍랑을 피해 볼음도에 들어왔는데 마침 보름달이 떠 있어서 볼음도라 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전설은 아마도 이 근처 바다가 연평바다처럼 조기 어장이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지 싶다. 볼음도 옆의 아주 작은 섬 아차도에서도 조기 파시가 열렸다. 지금은 40여 명이 살고 면적 0.67㎢에 불과한 아차도가 조기 파시 때면 1000명이 넘게 살았고, 처마 밑으로만 다녀도 비를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집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볼음도에도 어업이 번성했고 임경업 장군을 받들었다. 볼음도에도 기생집이 있을 정도로 흥청거렸다. 지금은 NLL 안이라 어로행위가 자유롭지 못해 어로를 하는 가구는 적다. 큰 배 1척, 작은 배 2척뿐이다. 그래서 주민들 다수는 배 없이 조수간만의 차가 큰 갯벌에 건강망(개막이 그물)을 설치해 밴댕이 같은 물고기를 잡는다. 또 갯벌에서는 상합(백합), 가무락(모시조개), 소라 등을 키워 소득을 올린다. 이 갯벌이 천연기념물 419호인 저어새 번식지이기도 하다. 저어새 보호 때문에 주민과 정부 간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한다. 섬이지만 볼음도의 주업은 농사다.
갯벌을 간척해 논을 만든 까닭에 가구당 평균 경작 면적이 3만3000㎡가 넘는다. 섬은 오랜 옛날부터 나지막한 모래밭에 나무를 심어 방풍림을 조성했다. 그래서 섬 안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이 방풍림과 산들이 바닷바람을 막아 줘 섬은 분지처럼 아늑하고 벼는 해풍의 피해를 입지 않고 튼튼하게 자란다. 섬에는 강화도의 트레일인 나들길 13구간이 13㎞ 남짓 조성돼 있어 걷기에도 좋다.
큰 마을과 폐교를 지나 내촌에 이르면 바닷가 저수지 옆에 은행나무 어르신이 우뚝 서 계신다. 볼음도 은행나무는 수령 800년, 줄기 둘레 8m, 밑동 둘레 9.7m, 키 25m. 천연기념물 304호다. 이 나무는 원래 북녘 땅에 살던 것이다. 고려시대 지금의 황해남도 연안군 호남리 호남중학교 운동장 자리에 암수 두 그루 은행나무가 살았는데, 어느 여름 홍수에 수나무가 뿌리 뽑혀 볼음도 바다로 떠내려 온 것을 주민들이 건져내 다시 심었다고 전해진다. 볼음도에서 연안까지는 불과 8㎞. 볼음도 주민들은 호남리 주민들에게 연락해 그 나무가 호남리에서 떠내려온 수나무인 것을 확인했다.
은행나무 생일상 의례 복원 제안
매년 정월 초 풍어제를 지낼 때면 볼음도와 호남리 어부들은 서로 날짜를 맞춰 생일을 지내주기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헤어진 두 은행나무 부부의 슬픔을 달래준 것이다. 은행나무는 한여름 무더위에 시달리던 섬 주민들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찜통 같은 더위에도 은행나무 그늘 아래만 들어가면 냉기가 돌 정도로 서늘했다. 열대야 같은 밤이면 주민들이 은행나무 그늘에 모여 잠을 청했다. 바닥에 거적을 깔고 삼사십 명의 어른들이 시원하게 잠 잘 때 아이들 열댓 명은 은행나무로 올라가 저마다 가지 사이에 자리 잡고 잠을 청했다. 나무와 한 몸이 된 아이들. 당시 풍경을 떠올려 보니 동화 속 세상 같다. 영화 아바타의 한 장면처럼 또 이중섭의 그림 속 아이들처럼 신비로운 모습들, 생각만으로도 세상이 다 환해진다.
하지만 수백 년을 이어오던 남북의 은행나무를 만나게 해 주던 행사는 6·25전쟁 이후 두 지역이 남북으로 갈리면서 중단됐다. 그 후 볼음도의 수나무는 시름시름 앓더니 점차 말라가기 시작했다. 섬 주민들은 연안에 사는 암나무의 안부를 알 길이 없어지자 수나무가 죽어가는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 1980년대 들어 은행나무 근처에 저수지가 만들어져 해수가 차단되자 볼음도 은행나무는 다시 살아나 푸르름을 되찾게 됐다. 들리는 풍문에는 북한의 암나무도 합동 풍어제가 중단된 후 시름시름 앓았는데 근래 호남중학교 교직원들의 보살핌을 받아 생기를 되찾았다고 한다. 호남리 은행나무도 북한의 천연기념물 165호로 보호받고 있다.
남북 정상이 합의한 ‘판문점 선언’은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 완화와 일체의 적대 행위를 멈추기로 했다. 구체적 실행 조치의 하나가 서해 NLL 평화수역화다. 서해 NLL은 휴전 상태에서 남북 간 교전이 수시로 빚어졌던 한반도의 화약고였다. 그런 NLL 일대를 평화수역으로 만들어 우발적 군사 충돌을 방지하고 안전한 어로활동도 보장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나그네가 일하는 (사)섬연구소에서는 NLL에 깃든 긴장을 풀고 남북 평화를 염원하는 뜻에서 문화재청에 볼음도 은행나무 생일상 의례 복원을 제안했다. 그리고 마침내 칠월 칠석날인 오는 17일 볼음도 은행나무 아래서 생일상 차리기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이제 볼음도 은행나무는 평화의 나무, 평화의 수호신으로 세상에 우뚝 설 것이다.
강제윤 시인은
강제윤 시인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 답사 공동체 인문학습원인 섬학교 교장이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통영은 맛있다》 《섬을 걷다》 《바다의 노스텔지어, 파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