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권의 호모글로벌리스 (4)] '진실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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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따가운 어느 일요일 오후, 스페인 팜플로나에 있는 투우장. 관중의 환호 속에 육중한 투우가 기세 좋게 뛰어든다. 먼저, 말을 탄 ‘피카도르’가 긴 창으로 소의 목덜미를 몇 차례 깊게 찌른다. 피가 치솟고 소의 기세는 한풀 꺾인다. 이어 양손에 작살을 든 3명의 ‘반데리예로’가 척추 부근에 작살을 내리꽂는다. 시뻘건 피가 솟구쳐 나오면서 소의 숨은 가빠진다.
백미는 투우사와 투우의 대결이다. 투우사는 붉은 천 ‘물레타’를 자유자재로 흔들며 소를 농락한다. 소가 충분히 지쳤다고 판단한 순간 투우사는 물레타 속에 감춘 칼을 꺼낸다. 정수리를 찌르려는 순간 투우사와 투우의 시선이 마주친다. 소는 알고 있다. 몇 초 뒤면 자신의 생명이 다할 것이라는 것을. 투우사는 알고 있다. 몇 초 뒤면 삶과 죽음의 진실이 가려진다는 것을. 아울러 투우를 죽여야 자신이 산다는 것을. 생사가 갈리는 절박한 이 순간은 ‘진실의 순간’이다. 헤밍웨이는 《오후의 죽음》이라는 작품에서 이 표현을 최초로 사용했다.
고통이 따르는 결정의 시간
마케팅 이론가 리처드 노먼은 이 개념을 경영학에 도입했다. 그에 따르면 소비자에게 기업이나 제품의 첫인상을 심어주는 순간이 바로 진실의 순간이다. 소비자가 기업이나 제품에 대해 갖는 첫인상이 성공 여부를 결정한다는 의미다. 1980년대 얀 칼슨 스칸디나비아항공(SAS) 사장은 직원들이 고객과 처음 만나는 15초가 바로 진실의 순간이라며 고객만족 캠페인을 벌였다. 그 결과 1년 만에 적자투성이 회사를 흑자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고객과의 첫 만남과 대화가 기업의 이미지를 결정짓고 결국 기업의 흥망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핵심적인 마케팅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모두에게는 진실의 순간이 있다. 고3 수험생에게는 수능 시험일이, 축구선수에게는 골대를 향해 슛을 날릴 때가, 야구경기에서는 2사 주자 만루에 볼 카운트 2-3에서 투수와 타자의 볼과 배트가 부딪치는 순간이, 선남선녀(善男善女)에게는 첫 미팅 때의 만남이 진실의 순간이다. 국가와 민족에게도 진실의 순간이 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세를 결정적으로 바꿨으며,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은 미·중 관계의 새로운 장을 연 진실의 순간이었다.
결혼식에서 진실의 순간은 주례의 성혼 선언이다. 어느 결혼식에서 주례가 성혼 선언을 하기 전에 하객들에게 물었다. “오늘 신랑신부의 결혼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는 분 있으세요?” 그때 뒤쪽에 아이를 안고 서 있던 여자가 앞으로 나섰다. 식장은 일순간 혼란에 빠졌다. 충격을 받은 모든 사람이 입을 다물었고, 신부는 실신했다. 주례가 하고 싶은 말을 묻자 그는 간신히 대답했다. “뒤에서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어요.”
헤밍웨이에게는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긴박한 순간이 진실의 순간이었다. 그는 1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사선(死線)을 넘나들면서 작가로서 진실의 순간을 끊임없이 추구했다.
죽음을 앞두고 진실을 추구한 어느 백인 부부의 이야기를 보자. 이 부부는 네 명의 아들을 뒀다. 세 명은 키도 크고 금발 머리에 하얀 피부를 가졌다. 그런데 막내만 키도 작고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가졌다. 임종이 다가오자 남편이 부인에게 물었다. “여보, 죽기 전에 사실대로 말해주구려. 막내가 내 아들이오?” 부인이 대답했다. “하늘에 맹세코 막내는 우리 아들이오.” 남편은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 그러자 부인이 중얼거렸다. “고맙게도 그이가 나머지 세 명의 아들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어!”
북핵 폐기냐 기만전술이냐
진실의 순간은 결정의 시간이다. 그러나 결정에는 고통이 따른다.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본인, 가정 또는 국가의 삶과 운명이 갈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못된 결정으로 성공한 기업가의 경우를 보자. 기자가 성공한 한 은행가에게 물었다. “성공 비결이 무엇입니까?” “간단하죠. 위기의 순간에 올바른 결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기자가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면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습니까?” “간단하죠. 경험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그런 경험을 하게 됐나요?” “간단하죠. 위기의 순간에 잘못된 결정을 했기 때문이에요.” 올바른 결정은 경험에서 나온다. 문제는 많은 경험이 잘못된 판단 덕분에 얻어진다는 것이다.
시간은 언제나 진실의 편이다. 새벽과 함께 진실은 기만과 거짓의 장막을 뚫고 맨 얼굴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남북한, 미·북 정상회담 개최로 고조됐던 북한 비핵화에 대한 기대가 우려로 바뀌고 있다. 과연 북한은 핵 폐기와 함께 정상국가의 길로 나아가겠다는 전략적 선택을 한 것일까? 아니면 경제제재 해제와 체제 생존을 위한 또 하나의 기만전술을 택한 것일까? 민족의 생사를 좌우할 진실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박희권 < 글로벌리스트·한국외국어대 석좌교수 >
백미는 투우사와 투우의 대결이다. 투우사는 붉은 천 ‘물레타’를 자유자재로 흔들며 소를 농락한다. 소가 충분히 지쳤다고 판단한 순간 투우사는 물레타 속에 감춘 칼을 꺼낸다. 정수리를 찌르려는 순간 투우사와 투우의 시선이 마주친다. 소는 알고 있다. 몇 초 뒤면 자신의 생명이 다할 것이라는 것을. 투우사는 알고 있다. 몇 초 뒤면 삶과 죽음의 진실이 가려진다는 것을. 아울러 투우를 죽여야 자신이 산다는 것을. 생사가 갈리는 절박한 이 순간은 ‘진실의 순간’이다. 헤밍웨이는 《오후의 죽음》이라는 작품에서 이 표현을 최초로 사용했다.
고통이 따르는 결정의 시간
마케팅 이론가 리처드 노먼은 이 개념을 경영학에 도입했다. 그에 따르면 소비자에게 기업이나 제품의 첫인상을 심어주는 순간이 바로 진실의 순간이다. 소비자가 기업이나 제품에 대해 갖는 첫인상이 성공 여부를 결정한다는 의미다. 1980년대 얀 칼슨 스칸디나비아항공(SAS) 사장은 직원들이 고객과 처음 만나는 15초가 바로 진실의 순간이라며 고객만족 캠페인을 벌였다. 그 결과 1년 만에 적자투성이 회사를 흑자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고객과의 첫 만남과 대화가 기업의 이미지를 결정짓고 결국 기업의 흥망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핵심적인 마케팅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모두에게는 진실의 순간이 있다. 고3 수험생에게는 수능 시험일이, 축구선수에게는 골대를 향해 슛을 날릴 때가, 야구경기에서는 2사 주자 만루에 볼 카운트 2-3에서 투수와 타자의 볼과 배트가 부딪치는 순간이, 선남선녀(善男善女)에게는 첫 미팅 때의 만남이 진실의 순간이다. 국가와 민족에게도 진실의 순간이 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세를 결정적으로 바꿨으며,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은 미·중 관계의 새로운 장을 연 진실의 순간이었다.
결혼식에서 진실의 순간은 주례의 성혼 선언이다. 어느 결혼식에서 주례가 성혼 선언을 하기 전에 하객들에게 물었다. “오늘 신랑신부의 결혼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는 분 있으세요?” 그때 뒤쪽에 아이를 안고 서 있던 여자가 앞으로 나섰다. 식장은 일순간 혼란에 빠졌다. 충격을 받은 모든 사람이 입을 다물었고, 신부는 실신했다. 주례가 하고 싶은 말을 묻자 그는 간신히 대답했다. “뒤에서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어요.”
헤밍웨이에게는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긴박한 순간이 진실의 순간이었다. 그는 1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사선(死線)을 넘나들면서 작가로서 진실의 순간을 끊임없이 추구했다.
죽음을 앞두고 진실을 추구한 어느 백인 부부의 이야기를 보자. 이 부부는 네 명의 아들을 뒀다. 세 명은 키도 크고 금발 머리에 하얀 피부를 가졌다. 그런데 막내만 키도 작고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가졌다. 임종이 다가오자 남편이 부인에게 물었다. “여보, 죽기 전에 사실대로 말해주구려. 막내가 내 아들이오?” 부인이 대답했다. “하늘에 맹세코 막내는 우리 아들이오.” 남편은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 그러자 부인이 중얼거렸다. “고맙게도 그이가 나머지 세 명의 아들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어!”
북핵 폐기냐 기만전술이냐
진실의 순간은 결정의 시간이다. 그러나 결정에는 고통이 따른다.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본인, 가정 또는 국가의 삶과 운명이 갈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못된 결정으로 성공한 기업가의 경우를 보자. 기자가 성공한 한 은행가에게 물었다. “성공 비결이 무엇입니까?” “간단하죠. 위기의 순간에 올바른 결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기자가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면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습니까?” “간단하죠. 경험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그런 경험을 하게 됐나요?” “간단하죠. 위기의 순간에 잘못된 결정을 했기 때문이에요.” 올바른 결정은 경험에서 나온다. 문제는 많은 경험이 잘못된 판단 덕분에 얻어진다는 것이다.
시간은 언제나 진실의 편이다. 새벽과 함께 진실은 기만과 거짓의 장막을 뚫고 맨 얼굴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남북한, 미·북 정상회담 개최로 고조됐던 북한 비핵화에 대한 기대가 우려로 바뀌고 있다. 과연 북한은 핵 폐기와 함께 정상국가의 길로 나아가겠다는 전략적 선택을 한 것일까? 아니면 경제제재 해제와 체제 생존을 위한 또 하나의 기만전술을 택한 것일까? 민족의 생사를 좌우할 진실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박희권 < 글로벌리스트·한국외국어대 석좌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