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돈가스처럼… 한국에 스며든 '일본식 서양문화'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번안 사회
백욱인 지음 / 휴머니스트 / 364쪽│1만9000원
백욱인 지음 / 휴머니스트 / 364쪽│1만9000원
우리가 평소 즐겨 먹는 돈가스는 어디 음식일까. 일본 음식일까, 서양 음식일까. 이 음식의 계보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슈니첼, 영국과 미국의 커틀릿, 일본의 가쓰레쓰로 이어진다. 얇게 썬 고기에 빵가루를 묻혀 부치듯 튀기는 서양식 슈니첼과 커틀릿을 1860년대 메이지 시대 이후 60여 년에 걸쳐 번안과 변형을 통해 만들었다.
슈니첼이 고운 빵가루를 묻혀 팬에 기름을 두르고 부치는 방식이라면 일본 가쓰레쓰는 굵은 빵가루를 묻혀 많은 양의 기름에 튀겨내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밥이나 된장국과도 먹을 수 있도록 배열하고, 영국의 우스터소스를 변형한 일본식 소스도 개발했다. 우리는 서양의 음식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식으로 ‘번안’된 이 음식을 일제 치하에서 그대로 습득했으며, 지금까지도 즐겨 먹고 있다.
《번안 사회》는 한국 근현대사를 ‘번안’이란 키워드를 중심으로 재해석하고 그 안에 감춰진 식민 지배의 흔적을 파헤친다. 저자는 백욱인 서울과학기술대 기초교육학부 교수다.
번안은 특정 장르의 작품을 다른 장르의 작품으로 바꾸거나, 시공간을 뛰어넘어 배경과 인물을 바꾸는 작업이다. 번안은 예술 분야뿐만 아니라 언어, 교육, 오락, 도시환경, 음식, 패션 등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이뤄진다. 특히 급격하게 사회가 변동하거나 외래 문화가 물밀듯 들어올 때 배경과 형태를 바꾸는 번안 작업이 활발하게 일어난다.
세계 어디에나 번안물은 존재한다. 저자는 우리가 행한 ‘번안’이라는 행위 자체를 문제삼지 않는다. 그 속에 담겨 있는 식민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무신경하게 수용해온 한국 사회의 현실을 비판할 뿐이다.
한국 근현대사에선 두 가지 방식의 번안이 이뤄져왔다. 하나는 한국이 서양을 번안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일본이 번안한 서양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 중에서 일본식 번안이 더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양옥, 양장, 양복 등 ‘양’자가 들어가 있는 우리의 많은 문물은 일본이 받아들이고 변형한 일본식 서양 번안물이다.
해방 후에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저자는 “남북이 분단되면서 민족문화의 형성이 저지되고 한국은 대륙과 통하는 통로를 차단당한 채 한반도의 섬나라가 되어 버렸다”며 “이후 미국에서 직접 서구 문화와 기술도 밀려 들어왔지만 여전히 그 흔적이 남았다”고 설명한다. 일본을 거쳐 번안된 서양의 기술과 문화는 1960년대 근대화 과정을 통해 다시 한번 번안됐다.
그렇다면 일제의 ‘이중 번안’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는 “의도적으로 폐기하는 수준을 넘어 더 이상 이런 식의 번안이 필요 없는 근거와 터전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말한다. “강건하게 내 장소에 내 것과 남의 것을 내 식으로 융합하고 배열할 수 있을 때 식민지 번안의 지긋지긋한 유령은 이 땅에서 사라질 것이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슈니첼이 고운 빵가루를 묻혀 팬에 기름을 두르고 부치는 방식이라면 일본 가쓰레쓰는 굵은 빵가루를 묻혀 많은 양의 기름에 튀겨내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밥이나 된장국과도 먹을 수 있도록 배열하고, 영국의 우스터소스를 변형한 일본식 소스도 개발했다. 우리는 서양의 음식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식으로 ‘번안’된 이 음식을 일제 치하에서 그대로 습득했으며, 지금까지도 즐겨 먹고 있다.
《번안 사회》는 한국 근현대사를 ‘번안’이란 키워드를 중심으로 재해석하고 그 안에 감춰진 식민 지배의 흔적을 파헤친다. 저자는 백욱인 서울과학기술대 기초교육학부 교수다.
번안은 특정 장르의 작품을 다른 장르의 작품으로 바꾸거나, 시공간을 뛰어넘어 배경과 인물을 바꾸는 작업이다. 번안은 예술 분야뿐만 아니라 언어, 교육, 오락, 도시환경, 음식, 패션 등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이뤄진다. 특히 급격하게 사회가 변동하거나 외래 문화가 물밀듯 들어올 때 배경과 형태를 바꾸는 번안 작업이 활발하게 일어난다.
세계 어디에나 번안물은 존재한다. 저자는 우리가 행한 ‘번안’이라는 행위 자체를 문제삼지 않는다. 그 속에 담겨 있는 식민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무신경하게 수용해온 한국 사회의 현실을 비판할 뿐이다.
한국 근현대사에선 두 가지 방식의 번안이 이뤄져왔다. 하나는 한국이 서양을 번안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일본이 번안한 서양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 중에서 일본식 번안이 더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양옥, 양장, 양복 등 ‘양’자가 들어가 있는 우리의 많은 문물은 일본이 받아들이고 변형한 일본식 서양 번안물이다.
해방 후에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저자는 “남북이 분단되면서 민족문화의 형성이 저지되고 한국은 대륙과 통하는 통로를 차단당한 채 한반도의 섬나라가 되어 버렸다”며 “이후 미국에서 직접 서구 문화와 기술도 밀려 들어왔지만 여전히 그 흔적이 남았다”고 설명한다. 일본을 거쳐 번안된 서양의 기술과 문화는 1960년대 근대화 과정을 통해 다시 한번 번안됐다.
그렇다면 일제의 ‘이중 번안’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는 “의도적으로 폐기하는 수준을 넘어 더 이상 이런 식의 번안이 필요 없는 근거와 터전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말한다. “강건하게 내 장소에 내 것과 남의 것을 내 식으로 융합하고 배열할 수 있을 때 식민지 번안의 지긋지긋한 유령은 이 땅에서 사라질 것이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