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북녘 가족 만났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옥살이 경험
[이산가족상봉] '방북 고초' 송유진씨… 26년 만에 동생들 재상봉
"나 알죠?"
북쪽의 동생이 남쪽의 형을 만나자마자 던진 첫마디였다.

1992년 평양에서 만났던 형제는 26년 만에 금강산에서 다시 상봉했다.

짙은 곤색 양복을 입은 송유진(75) 씨는 24일 오후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에서 약간 긴장한 모습으로 북측의 동생 송유철(70) 씨를 기다렸다.

얼마 후 유철 씨가 환하게 웃으며 상봉장 안으로 들어오자 유진 씨는 벌떡 일어나 동생의 손을 잡았다.

유철 씨는 이내 "엄마 죽었잖아"라고 말하며 눈물을 터뜨렸고, 유진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송유진 씨는 이미 1992년 9월 방북해 모친과 동생들을 만난 적이 있다.

송씨는 방북을 앞두고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1992년) 당시 북한 사람을 만나도 된다는 방송을 듣고 북한 주민 접촉 신청을 했다"며 "태국에 공장이 있었는데, 허가서를 가지고 태국 공사관을 접촉했다"고 말했다.

이어 "신고를 하고 1년 후에 (북쪽의) 어머님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다시 통일원에 가서 방북 허락을 해달라고 했고, 결국 북에 갔죠"라고 덧붙였다.

당시 방북 기간 송씨는 어머니와 함께 동생 유철 씨도 만났다.

그러나 송씨는 방북 뒤 예상치 못한 고초를 겪었다.

1997년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송씨를 태국 등 제3국을 거쳐 북한에 다녀온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구속했다.

재판에서 2년 6개월을 선고받은 그는 1년여를 복역하다가 1998년 8·15 특사로 풀려났다.

이는 당시 언론이 다룰 정도로 파장이 큰 사건이었다.

당시 안기부는 송씨에게 북한에서 접촉한 사람의 리스트를 대라고 추궁했다고 한다.

"저녁에 만난 사람이 높은 사람인 것 같다고 했더니 사진을 보여주더군요.

이 사람이라고 짚었더니 그 사람이 (북한의) 권력 순위 3위인 외교부장(외무상) 백남순이라고 하더라고요.

어떻게 이렇게 높은 사람을 만났느냐고 추궁하더군요.

"
그는 "(안기부가) 스토리를 만들어서 도장을 찍으라고 했다.

발명협회, 중소기업공단 책자, 무역협회 책자 등을 북에 줬다고 꾸며서 기소했다"고 주장했다.

또 "(사건이) 대법원까지 갔는데, 다른 검사가 와서 국법준수 서약서를 쓰면 8·15 때 사면해주겠다고 했다"며 "그래서 결국 선고를 받고 사면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이후 송씨는 두 차례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했지만, 매번 상봉단으로 선발되지 못했다.

그는 이번에 북에 있는 동생을 다시 상봉하게 된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며 "다시 삶을 사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소회를 밝혔다.

황해도 평산군 출신의 송씨 가족은 6·25전쟁 발발 당시 부모님과 4남매가 모두 함께 의정부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누이와 함께 할아버지가 사는 포항으로 피신하고, 그의 어머니는 동생들을 데리고 개성의 친정집으로 가면서 가족이 생이별하게 됐다.

아버지는 폭격으로 사망했다.

휴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가 세상을 등지고, 송씨는 누이와 함께 보육원으로 보내졌다.

그는 고학으로 대학을 나와 대우자동차, 현대자동차에서 근무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1992년 방북 때 만났던 어머니(당시 68세)는 큰아들을 보고 싶다던 소원을 이루고 1년 뒤 세상을 떠났다.

당시 북녘의 여동생 송유순 씨는 김일성종합대 출신의 의사, 남동생 송유철 씨는 김책공대를 나와 당시 김책연구소 부소장을 지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금강산에서 송씨가 동생 유철 씨에게 "김책연구소 부소장까지 했어?"라고 묻자 동생은 "김책기술연구소 소장까지 했지"라며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유철 씨는 잠시 후 테이블에 올려놓은 보따리를 풀었다.

보자기에 싸였던 상자를 여니 유철 씨가 북한 당국으로부터 받은 각종 훈장 11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