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 장 앙투안 테오도르 기루의 ‘테세우스를 만난 오이디푸스와 두 딸’(1788, 유화). 미국 댈러스 미술관 소장.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 장 앙투안 테오도르 기루의 ‘테세우스를 만난 오이디푸스와 두 딸’(1788, 유화). 미국 댈러스 미술관 소장.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나의 눈길을 끌고 숨을 멎게 할 만큼 매력을 발산하는 대상의 기준은 무엇인가. 인류 모두에게 적용되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존재하는가? 내가 속한 공동체가 ‘아름답다’고 정의하고, ‘그렇다’고 교육받아 온 그것이 아름다운가? 고대 그리스인들이 생각한 완벽한 비율을 지닌 동상들, 예를 들어 기원전 2세기 ‘밀로의 비너스’나 기원전 5세기 ‘원반 던지는 사람(디스코볼로스)’에 등장하는 인간 모양만이 아름다운가?

서양은 18세기 중반 고대 로마의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을 재발견하면서 ‘신고전주의’를 시작했다. 신고전주의는 당시 장식과 비조화, 신의 은총을 강조했던 바로크와 로코코 형식에 대항해 르네상스와 고대 그리스의 예술을 모체로 삼았다. 조화와 비율, 일치는 신고전주의의 문법이다.

숭고

18세기에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신고전주의와 더불어, 그 신고전주의가 숨 쉴 수 있는 ‘틈’들도 유럽인들 어휘에 등장했다. 천재성, 상상력, 취미, 정서, 감정, 즉흥과 같은 단어들을 통해 새로운 개념의 아름다움이 등장했다. 천재성과 상상력은 창작자의 능력을 표시하고 취미, 정서, 감정, 즉흥은 창작자가 어떤 대상에 느끼는 사적이며 시적인 능력을 시사한다. 이 용어들은 작품이 지닌 객관적이고 수학적인 특징들이 아니라 주관적이고 사적인 태도들이다.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지닌 내재적인 가치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관찰자의 반응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 해당 작품을 창작하는 데 필요한 원칙을 찾아 연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뿜어내는 반응에 대한 효과로 이동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그리스 비극을 ‘완벽한 형태를 추구하는 불안정한 연습과정에 대한 재현’이라고 정의했다. 무대 위에 선 배우의 말과 행동은 단호하고, 수단과 목적이 하나가 되며 압도적이어야 한다. 그 평가는 비극을 보는 아테네 관객들의 정서적인 반응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목표를 ‘공포’와 ‘연민’이라고 정의한다. 공포와 연민은 전적으로 비극을 관람하는 관객의 반응이다. 18세기 영국 철학자 데이비드 흄(1711~1776)은 ‘취미의 기준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을 그대로 수용했다. 미에 대한 정서가 사람마다 다른 이유는 세세한 감정을 전달하는 데 필요한 상상력의 섬세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고유한 섬세함을 표현하기보다는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억지로 편입시키면서 눈치를 보고 문화적인 인간이라고 행세할 뿐이다.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취미로) 책 읽는 소녀’(1770, 유화, 82×65㎝). 미국 워싱턴 국립미술관 소장.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취미로) 책 읽는 소녀’(1770, 유화, 82×65㎝). 미국 워싱턴 국립미술관 소장.
예술에 대한 경험자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자 효과가 숭고(崇高)다. ‘숭고’라는 개념을 맨 처음 학문적으로 소개한 사람은 위(僞)롱기누스(213~273)라는 수사학자다. 호메로스의 시나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웅장하고 감동적인 표현들은 창작자와 관객 모두에게 격정적인 감동을 자아낸다. ‘숭고’란 작품 안에 숨어 있는 신비한 어떤 것으로, 그것을 온전히 감상하는 사람들을 무아 상태로 빠뜨린다. ‘숭고’에 해당하는 라틴어 ‘수블리미스(sublmis)’의 어원을 보면 그 의미를 더욱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 단어는 ‘문지방(門地枋)’이나 창, 입구 등의 위에 댄 가로대인 ‘상인방(上引枋)’, 더 나아가 ‘터부의 공간’을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 ‘리멘(lmen)’과 그곳을 향해 부지런히 가는 마음의 상태를 담은 전치사로 ‘~로 향해’라는 의미를 가진 ‘수브(sub)’의 합성어다. 숭고란 남들이 감히 진입해 본 적이 없는 경계로 들어가려는 마음가짐이다.

테세우스의 아테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인들은 자신들이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정치인 민주주의를 실험하고 있었다. 왕정시대 기준은 왕이 정했다. 아니, 왕이 기준이었다. 그리고 그 기준을 어기는 자는 벌을 받았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의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인간이지만 터부이자 오염이다. 문명의 근간인 가족의 기본 관습과 윤리를 파괴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테베를 역병으로 병들게 만들었던 스핑크스라는 괴물보다 더 무섭고 파괴적인 괴물이다.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와 그의 두 딸 안티고네, 이스메네는 아테네로 가는 문지방인 콜로노스에서 그곳을 지키는 주민들과 깊이 대화한다. 오이디푸스는 그 당시 사회가 정한 관습과 도덕의 객관적인 기준에서는 기피의 대상이지만, 경청을 동반한 대화를 통해 콜로노스 주민과 다름없는 인간, 더욱이 불가항력적인 운명을 어깨에 진 희생자로 여겨졌다. 콜로노스 주민들은 오이디푸스의 죽음이 아테네의 번영과 보호를 보장하는 상징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아테네의 왕 테세우스가 등장해 오이디푸스를 살핀다. 테세우스는 눈이 피투성이가 된 장님이 그 유명한 오이디푸스라는 사실을 단박에 알아차린다. 그는 더러운 옷을 입고 비참한 얼굴을 한 오이디푸스를 소문에 근거해 판단하지 않는다. 테세우스는 이 불쌍한 자를 보고 동정하며 부른다. “오 비참한 운명의 소유자인 오이디푸스여!” 테세우스는 오이디푸스의 고통에 연민을 느낀다. 그 이유는 자신도 오이디푸스와 같이 고통스러운 세월을 살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대처럼 이방인으로 자랐으며 혈혈단신으로 목숨을 걸고 이국땅에서 수많은 위험과 싸웠습니다.”(562~564행)

테세우스가 오이디푸스를 온전히 이해하고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자신도 한때 이방인으로 경계를 기웃거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랜 세월 별별 고통을 당하며 깨달았다. “나는 내가 한갓 인간이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내일이면 당신보다 더 큰 운명이 주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566~568행)

테세우스는 자신이 치리하는 아테네로 진입하려는 한 인간을 이해한다. 왜냐하면 자신도 과거에 그런 비참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테세우스는 자신의 직인 왕을 자신의 소유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 왕이란 ‘하루 동안’ 맡은 일일 뿐이다.

오이디푸스는 용기를 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테세우스에게 말한다. “내가 이리로 온 것은 내 이 비참한 육신을 당신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서입니다. 볼품없어 보여도, 거기서 생기는 이익은 아름다운 모습보다 강력합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객관적인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찾지 말라고 주장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과 같은 터부와 다름을 수용하는 관용에서 온다. 그리고 말한다. “가장 사랑하는 아이게우스의 아들(테세우스)이여! 오직 신들만이 늙지도 죽지도 않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전능한 시간이 파괴해 버립니다.” 오이디푸스의 감동적인 말을 경청한 테세우스는 콜로노스 주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이디푸스를 아테네라는 민주도시 시민으로 수용하기로 결정한다. “나는 그(오이디푸스)를 시민으로 이 나라에 받아들일 것이오. 이곳에 머무는 것이 나그네 마음에 든다면, 나는 그대(콜로노스 주민들)에게 명해 그를 지켜주게 할 것이오.”(637~639행)

안티고네는 테세우스와 콜로노스 주민들의 말을 듣고 외친다. “오오! 당신들은, 극찬을 받은 나라입니다. 이제 그 빛나는 찬사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그대의 몫입니다.”(720~721행) 안정된 도시인 아테네는 이방인을 받아들여 새로운 도시로 탈바꿈할 것이다. 그런 숭고한 노력에는 항상 희생(犧牲)이 따르기 마련이다.

테베의 크레온

테베의 왕 크레온은 부하들을 데리고 오이디푸스를 잡으러 온다. 그는 오이디푸스를 테베의 전(前)왕으로 추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신에 근거해 테베 입구에 그의 시신을 매장함으로써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콜로노스에 왔다. 크레온은 오이디푸스의 딸 이스메네를 이미 납치했고, 오이디푸스의 눈이 돼 준 안티고네도 부하들을 시켜 강제로 납치한다. 오이디푸스는 외친다. “아 극악무도한 자여, 자네는 눈먼 나에게서 내 눈을 빼앗는구나!”(866~867행) 테세우스가 다시 무대에 등장할 때는 크레온의 부하들이 이미 안티고네를 납치한 후다. 무대 위에서 오이디푸스와 크레온은 테세우스와 콜로노스 주민들 앞에서 마치 법정에서 변론하는 것처럼 자신들의 이야기를 주장한다.

희생과 수고

테세우스가 오이디푸스에게 말한다. “오이디푸스여, 그대는 이곳에서 편안히 머물러 계십시오. 내가 먼저 죽지 않는 한, 그대의 두 딸을 그대에게 데려다 주기 전에, 나는 결코 쉬지 않을 것입니다.” 테세우스는 보잘것없는 오이디푸스의 간청을 듣고, 오이디푸스의 두 딸을 구하기 위해 테베와의 전쟁도 감수하기로 결심한다.

테세우스는 자신이 만들 민주도시 아테네의 근간이 다름을 인정하는 다양성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오이디푸스는 감탄한다. “오, 테세우스여! 당신의 숭고함으로 당신은 번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우리를 위해 사려 깊은 수고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소포클레스와 민주주의] 터부와 다름을 수용하는 관용… 민주도시 아테네를 지탱하는 '뿌리'
테세우스는 비참한 오이디푸스를 보고 공포와 연민을 느꼈고, 그를 위해 희생할 각오를 했다. 테세우스의 반응이 바로 숭고함이다. 나는 이인칭과 삼인칭을 남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서 평가하는가? 아니면 나는 그들을 또 다른 나, 또 다른 일인칭으로 느끼는가.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을 버리고 저 너머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겠다는, 자유롭고 겸허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바로 ‘숭고’가 아닐까?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