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노화랑이 오는 20일까지 여는 ‘청전 이상범-소정 변관식’전에 출품한  청전의 ‘추경산수’.
서울 노화랑이 오는 20일까지 여는 ‘청전 이상범-소정 변관식’전에 출품한 청전의 ‘추경산수’.
국내 미술시장에서 서양화 장르가 급속히 성장하면서 한국 전통 산수화는 옛사람들이 그린 그림 정도로 여겨지는 등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1998년 미술품 경매가 시작된 이후 국내 미술시장에서 서양화 부문 최고 그림값은 85억원(김환기의 빨간 점화 ‘3-II-72 #220’)까지 치솟았다. 반면 근대 한국화의 거장 변관식과 이상범의 작품 가격은 40호 전지(100×72.7㎝) 크기 기준 1억원 수준으로 수년째 제자리걸음이다.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가 최근 발표한 올 상반기 작가별 경매 낙찰총액 상위 20위권에는 조선시대와 근현대 한국화 작가는 없고, 대부분 국내외 서양화가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우리 고유 전통미학의 시장 소외현상이 얼마나 심각한지 단적으로 보여준 대목이다.

서울 관훈동 노화랑이 오는 20일까지 펼치는 가을 기획전 ‘청전 이상범(1897~1972)과 소정 변관식(1899~1976)’은 이런 한국화의 위기 속에서 우리 민족의 보편적 정서를 독특한 예술세계로 승화시킨 두 거장의 미의식을 재조명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청전-소정’을 제목으로 붙인 이번 전시에선 미술애호가들과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 20여 점을 모아 보여준다. 노승진 노화랑 대표는 “최근 한국화가 너무 대접을 받지 못하면서 기성 작가조차 의욕을 잃고 작업을 기피하고 있다”며 “그 원인을 찾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전시회”라고 설명했다.

◆안중식 등에게 배운 요산요수 정신

변관식의 ‘외금강 삼선암’
변관식의 ‘외금강 삼선암’
청전과 소정은 이당 김은호, 의재 허백련, 심향 박승무, 심산 노수현 등과 함께 근대 한국화 6대 작가로 불린다. 조선 말기 화가 심전 안중식(1861~1919)과 소림 조석진(1853~1920)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운 두 사람은 선인들의 이념, 즉 ‘요산요수(樂山樂水) 정신을 기치로 조선회화와 근대 한국화의 가교 역할을 한 영원한 맞수로 꼽힌다. 우리 고유의 전통적인 미감과 정서를 현대화하고자 애썼다는 점에선 비슷하지만, 작가적 표현기법 면에선 서로 많이 달랐다.

청전은 ‘갈필법’(渴筆法·물기 없는 붓에 먹을 묻혀 그리는 기법)을 활용해 화면을 근경·중경·원경으로 구성한 이른바 ‘청전 양식’이라는 새 화법을 개발했다. 이를 통해 심전이나 소림의 남종화적인 산수화풍에서 벗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소정은 붓에 먹을 엷게 찍어 그림 윤곽을 만들고, 그 위에 다시 먹을 칠해나가는 적묵법(積墨法)과 진한 먹을 튀기듯 찍는 파선법(破線法)의 독특한 화법을 활용해 겸재 정선의 진경(眞景)산수화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했다.

◆청전의 강렬한 준법

전시장에는 전통 수묵채색화를 근대적인 양식으로 재창조한 청전과 강렬한 준법으로 독특한 수묵화 세계를 구축한 소정의 작품이 서로 마주하며 묘한 기운을 뽐낸다.

청전은 주로 가을 정취를 많이 그렸다. 아마도 나무와 잡풀을 속필로 처리하는 청전 특유의 준법을 나타내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2m 크기 ‘추경산수’는 온 천지의 가을 기운을 마음껏 펼쳐 보이는 작품이다. 오른쪽 산밑에서 나와 왼쪽편의 야트막한 기슭으로 휘돌아나가는 길이 나직하게 이어지고, 드문드문 늘어선 나무 사이엔 낙엽들이 흐드러지게 뒹군다. 야산과 개울물은 간접조명처럼 앞산을 환하게 껴안는다. 물통을 진 남정네의 걸음걸이에도 추색이 만연하다. 화창한 봄날의 고즈넉한 산촌마을을 잡아낸 ‘춘경산수’, 일을 마치고 소를 몰고 귀가하는 모습을 묘사한 ‘하경산수’ 등도 짜릿한 감성을 녹여낸 역작이다.

◆소정의 질박한 구도와 터치

질박한 터치, 파격적인 구도가 어우러진 소정 작품도 여러 점 걸렸다. 30대에 8년이나 금강산을 누볐던 소정이 두고두고 당시의 감동을 녹여낸 1969년 작 ‘단발령’은 고개에서 멀리 솟아오른 금강산 봉우리를 둔중하게 담아낸 수작이다. 하늘로 솟아오른 산세와 뱃놀이를 즐기는 촌로가 대조를 이루며 대가다운 솜씨를 드러낸다. 1960년대 작업한 ‘외금강 삼선암’ 역시 생명력을 갖고 치솟은 거목 같은 꿈틀거림이 느껴진다. 바위를 끝까지 그리지 않고 윗부분을 싹둑 잘라낸 파격에선 거장의 기개 또한 감지된다. 소나무의 무리를 붓끝에 녹여낸 ‘송림(松林’), 옹기종기 모여 있는 촌가를 산기슭에서 버섯이 돋아난 것처럼 표현한 ‘추경산수’에도 대가의 묘기가 흐드러지게 녹아있다. 관람료는 없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