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갑영 칼럼] 시애틀의 '작은 도시, 큰 기업' 신화
미국 워싱턴주의 시애틀은 실리콘밸리 못지않게 세계적인 대기업을 많이 보유한 도시로 유명하다. 인구 70여만 명의 북서부 변방도시에 ‘포천 500대 기업’ 중 31개사의 본사가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MS)는 물론이고 보잉과 스타벅스, 코스트코에 이르기까지 글로벌 대기업이 즐비하다. 나아가 1만여 개의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에 20만 명이 일하고 있고 소프트웨어 인력도 10만 명에 이르며 올 한 해에만 300여 개의 신생기업이 탄생했다고 한다. 시애틀은 당연히 미국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도시로 부러움을 사고 있다.

시애틀의 ‘작은 도시, 큰 기업’ 신화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처음은 항공기를 제작하는 보잉으로부터 시작됐다. 1900년대 초 나무로 비행기를 만들던 시절 보잉은 산림자원이 풍부한 시애틀에 둥지를 틀어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군사용 특수로 크게 성장했다. 한때 보잉은 시애틀 인구 35만 명의 3분의 1을 고용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지만 1960년대 말에 침체와 극심한 노사갈등으로 4분의 3을 구조조정해야만 했다. 이 여파로 1971년의 시애틀은 실업률과 빈 주택 비율이 각각 14%와 16%에 이르러 가장 저주받은 도시로 전락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대 스타벅스와 MS가 나타나면서 시애틀은 다시 세계가 주목하는 역동적인 창조도시로 도약한다. 이어 1990년대에는 최근 시가총액 1조달러를 돌파한 아마존이 세워지면서 시애틀의 ‘작은 도시, 큰 기업’ 신화가 지속되고 있다. 현지에서는 보잉과 MS 창업자의 애칭이 모두 빌(Bill)이기 때문에 시애틀은 두 사람의 빌이 150여 년을 살려왔다고 칭송한다.

무엇이 과연 이 작은 도시에 거대한 기업의 융성을 가능하게 하는가? 《작은 도시, 큰 기업》의 저자 모종린 연세대 교수는 시애틀의 스타벅스, 포틀랜드의 나이키, 팰로앨토의 구글, 엘름훌트의 이케아 등을 분석하면서 “도시의 차별화된 라이프 스타일이 기업의 경쟁력”이라고 지적한다. 시애틀의 커피 문화, 포틀랜드의 아웃도어 문화처럼 독특한 정체성을 가진 지역의 생태계가 스타벅스와 나이키 같은 글로벌 기업을 탄생시킨다는 것이다.

성공 신화의 핵심은 결국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사업화되고 외연을 확대해 세계적 역량을 갖출 수 있게 뒷받침하는 혁신 문화와 산업 생태계에 달려 있다. 커피 한 잔에 영혼을 담아 세계를 제압하겠다는 꿈을 살려내는 도시의 문화, 소프트웨어 개발과 웹 기반의 컴퓨팅 서비스 등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살아 숨 쉬게 하는 발명과 창업, 혁신의 생태계가 살아 있어야 한다. 작은 일상에서부터 기업, 산업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혁신을 추구하는 시스템과 문화가 정립돼 있어야 한다. 실제로 시애틀에는 삶의 질과 개성을 중시하는 라이프 스타일뿐만 아니라, 창조적 파괴를 담은 독립적인 음악이 있고 ‘혁신’과 ‘뉴 아이디어’의 문화가 곳곳에 살아 움직이며 자금 조달과 벤처 기업을 뒷받침하는 시스템 및 문화적 인프라가 풍부하다. 시장에서 박물관까지 시내 어딜 가나 ‘혁신’의 담론이 풍미하고 초등학교부터 혁신의 역사와 새로운 아이디어의 형성 과정을 일상에서 체험하는 학습도 인상적이다.

1980년대 중반까지도 산업경쟁력은 부존자원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지금은 자원 하나 없는 아일랜드의 1인당 국민소득이 7만달러를 넘지 않는가. 창의적 아이디어를 성공시키는 시장의 생태계와 혁신지향적인 문화,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시스템이 바로 경쟁력의 원천이다. 개인의 창의성과 혁신 문화, 대학의 연구기반이 융합된 시애틀 같은 도시가 보잉과 MS, 아마존 등으로 이어지는 산업의 트렌드를 선도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은 언제 이런 신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세계적 기업을 탐방할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다. 문화나 생태계는 결코 공적자금이나 정부의 지시로 형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역사회가 시장과 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 작은 일상에서부터 교육과 제도에 이르기까지 자율과 혁신의 문화를 정착시켜야만 우리도 시애틀의 신화를 꿈꿀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