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 칼럼] 트럼프의 위기, 한국의 위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상대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근년의 정치 지도자 가운데 그처럼 협력적 관계를 설정하기 어려운 사람은 없었다.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 할 때, 우리는 일단 그에게 우리가 우호적인 존재임을 알리고 이후의 행위들로써 증명하려 애쓴다. 사람은 자신에게 우호적인 존재에 대해선 우호적 태도를 보인다. 실제로 그렇게 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통해서 사회가 유지되고 문명이 발전한다.

생물학자들이 ‘상호적 이타주의’라 부르는 이 근본적 원리가 트럼프에겐 통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먹이를 주는 손을 문다. 더욱 문제적인 것은 물을 만한 객관적 이유 없이 느닷없이 문다. 그러다 보니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 화해할 수 없는 적들이 된다.

전형적인 경우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의 관계다. 트럼프가 당선되자 아베는 비굴할 정도로 트럼프의 비위를 맞추려 애썼다. 빠르게 커지는 중국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일본으로선 미국과의 동맹이 튼튼해야 한다는 사정을 인식한 것이었다.

그런 친구를 트럼프는 철저히 경멸했다. 북한 비핵화를 위한 미국의 노력이 돌파구를 찾자 아베는 북한이 납치한 일본인들을 의제로 삼아달라고 애원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일본 지도자는 단숨에 큰 정치적 자산을 얻는다. 당시 추문으로 퇴진의 위기를 맞은 아베로선 탐나는 성과였다.

그러나 트럼프는 아베를 끝내 외면했다. 준비 없이 임했다가 북한에 농락당한 ‘쇼’라는 평가를 받은 싱가포르 회담에서 트럼프가 성과로 내세운 것은 미군 유해들의 반출이었다. 이왕 비핵화의 의제를 벗어난 사항을 포함했다면 일본인 피랍자들에 관한 합의도 포함할 만했지만 그 문제는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당시 분위기로 봐 트럼프가 마음을 썼으면 그 문제는 상당한 진전을 봤을 터이고 트럼프는 감격한 아베를 영원한 친구로 만들 수 있었다. 그저 눈앞의 자기 이익만을 챙기느라 친구를 도와서 얻을 커다란 이익을 보지 못한 것이다.

예정에 없던 미군 유해 송환이 회담의 성과로 선전되니 아베는 처지가 더욱 곤란해졌다. 결국 일본은 미국에 알리지 않은 채 북한과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트럼프는 자신의 신의 없는 태도를 성찰하는 대신 아베에게 화를 냈지만 이미 트럼프에게서 기대할 것이 없고 정치적 입지도 탄탄해진 아베는 마음을 쓰지 않는다. 트럼프는 일본에 대해 관세로 보복하겠다고 나섰지만 그런 조치는 중국과의 관세 전쟁을 더욱 어렵게 만들 따름이다.

그렇게 친구들을 모조리 적으로 만들면서 트럼프는 도저히 친구가 될 수 없는 적들과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및 김정은 북한 위원장과는 오히려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애쓴다. 애초에 먹이를 주겠다고 그들이 손을 내밀지 않았으니 물어뜯을 기회가 없다는 사정도 있을 터이고 그런 음산한 전체주의자들과 어울리는 것이 “잡놈(rascal)” 소리를 들을 만큼 부도덕한 그로선 마음이 편하리라는 점도 있을 터이다.

밥 우드워드의 《공포》는 백악관에도 트럼프의 친구가 없다는 것을 밝혔다. 원래 대통령의 참모들은 대통령과 이해가 일치하는 집단이어서 본능적으로 대통령을 감싼다. 그런 집단도 트럼프의 예측 불가능한 행태에 전전긍긍한다는 얘기다. 나라를 걱정하는 참모들이 대통령의 뜻을 조직적으로 방해한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이어 백악관의 현직 참모가 익명으로 백악관의 상황이 실제로 그렇다고 확인하는 글을 신문에 발표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 글을 썼다고 의심받는 사람들 가운데 트럼프의 아내와 딸이 포함됐다는 사실이다.

지금 트럼프는 빠져나오기 힘든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러시아와 검은 거래들을 했다는 의혹이 점점 구체화되고 그의 하수인들이 검찰의 증인이 되면서 탄핵의 가능성이 점점 커진다.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패하면 탄핵당한다고 트럼프 자신이 지지자들에게 노골적으로 호소하는 판이다.

이런 상황은 온 자유 세계에 위험하지만 우리에게 특히 위험하다. 트럼프가 당장 치적으로 내세울 만한 것은 북한의 비핵화에서의 성과다. 그러나 실질적 성과를 내기 어려우니 트럼프로선 북한에 큰 양보를 하고 북한의 작은 양보를 얻어 치적으로 선전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지금 우리의 전략과 외교 역량은 그럴 가능성을 줄이는 데 집중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