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명저] "정치인 무지와 국민의 나약함이 파국 불러"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윈스턴 처칠 《제2차 세계대전》
‘불필요했던 전쟁(unnecessary war)’.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2차 세계대전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하고 물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내놓은 답이다. 1500만여 명의 사상 최대 사망자를 낸 최악의 전쟁을 막을 기회가 너무 많았다는 회한이 담긴 한마디다.
《제2차 세계대전》은 영국 총리로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처칠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긴 회고록이자 역사서다. 처칠은 “두 차례 최악의 전쟁을 고위직에서 경험한 사람은 아마 내가 유일할 것”이라며 “실수를 성찰하고, 오류를 교정하고,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고 밝혔다. “도덕적인 사람들의 나약함이 사악한 사람들의 적의를 어떻게 강화시켰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설명이다.
맹목적 평화주의에 지배됐던 유럽
총 6권 5000여 쪽의 방대한 저작을 관통하는 정서는 안타까움이다. 처칠은 ‘공포와 피비린내 나는 포격에 기초한 독재체제(나치즘)의 등장’에도 세계 지도자들은 “불편한 현실과 마주하기를 거부하고, 국익을 무시한 채 대중적 인기만 갈망했다”고 전한다. 세계의 운명이 달린 그 중대한 시기에 영국 총리였던 볼드윈은 유럽 정세에 무지했다고 개탄했다.
유럽인들의 경계심은 나치 독일 지도자 히틀러의 능수능란한 수사에 무너졌다. 체코 수데텐 지역을 기습 점령한 히틀러는 “이것이 영토에 관한 내 마지막 요구”라며 할양해줄 것을 요구했다. 대재앙의 전초전이었다. 독일에 전력이 뒤지지 않던 체코는 항전 의지를 다짐했지만, 유럽 강국들은 ‘마지막 요구’라는 말을 믿고 사태를 봉합하는 데 급급했다. “전쟁을 감당할 자신과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의 참극을 겪은 당시 영국은 반전 분위기가 압도했다. 1차 대전 때 총리를 지낸 거물 정치인이었던 로이드 조지조차 이런 상황에 편승해 히틀러의 군사행동을 “베르사유 조약 위반이 아니다. 왜냐하면 (1차 대전 승전국들의) 도발행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변호했다. 영국의 대표적 사회주의자였던 노동당의 필립 스노든은 “히틀러가 제안했던 평화교섭이 무시됐다”며 그를 옹호하기까지 했다.
맹목적 평화주의도 파국으로 치달은 요인으로 꼽힌다. “독일이 국제연맹을 탈퇴했는데도 영국 노동당과 자유당은 ‘평화’를 들먹이며 군비 축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전쟁광과 유언비어 유포자로 몰아세웠다. 두 당은 앞으로 어떤 일이 전개될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호응에 의해 고무되고 있었다.”
“국민들 역시 전쟁을 피할 수 있게 됐다는 안도감에 안주했다”는 게 처칠의 통탄이다. 독일의 잇단 인접국 침략을 “옛 자국 영토를 되찾는 것일 뿐”이라며 감싸는 영국인이 태반이었다.
처칠은 ‘표’를 위해서라면 국가 존망의 문제마저 외면하는 정치꾼들의 존재도 개탄했다. ‘군비 확장 반대’를 슬로건으로 선거를 준비하던 대다수 정치인은 독일의 야망과 전쟁 준비를 인지하고도 침묵하고 부인했다.
‘평화로의 경도’는 뮌헨회담의 전말에서 확연해진다. 1938년 9월, 독일 뮌헨에서 히틀러와 회담하고 귀국한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열광하는 군중에게 “우리 시대의 평화가 왔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 푹 자라”고 연설했다. “수데텐을 넘겨주는 대가로 평화를 약속받았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불과 1년 뒤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함께 2차 대전의 막이 올랐다. “히틀러의 침략과 도발은 독일의 군사력이 뒷받침해서만이 아니라 프랑스와 영국의 분열과 소극적 태도, 미국의 고립정책이 부추겼다”는 게 처칠의 결론이다.
'철의 장막'이 민주주의 위협
《제2차 세계대전》은 감당하기 힘든 전장의 한복판에서 느낀 두려움도 그대로 전하고 있다. “전쟁 40일 만에 우리는 고립무원 상태가 됐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절체절명의 공격을 퍼부었다”며 공포감을 토로한다. 또 “일본은 정체를 모를 위협적 존재였다”며 “일본군의 폭격으로 영국 군함 두 척이 침몰한 때가 가장 충격적이었다”고 회고했다.
힘겨운 승리를 쟁취했지만, 처칠에게는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던 포츠담회담 기간에 열린 국내 총선에서 불의의 패배를 당했다. 그로 인해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재야에서도 그는 국제 정세에 대한 깊은 안목으로 질서 재편의 중심에 섰다. 1946년 3월 미국 웨스트민스터대 초청 강연에선 “전후 세계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고 있다”며 소련의 전면 부상이 부른 ‘철의 장막’ 문제를 제기해 큰 파장을 불렀다.
그러면서 그는 유럽합중국(United state of Europe)이라는 원대한 구상을 평화 해법으로 제시했다. 처칠의 유지(遺志)를 살려 탄생한 유럽연합(EU)에 균열을 낸 주인공이 브렉시트를 결행한 영국이라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 책은 서유럽 동유럽 소련 아시아, 태평양과 대서양에서 전개된 많은 전투들의 전개과정을 꼼꼼한 필체로 전달한다. 최악의 전쟁에 임하는 열강 지도자들의 심리와 고뇌를 인문학적 사유에 버무려 손에 잡힐 듯이 묘사했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
《제2차 세계대전》은 영국 총리로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처칠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긴 회고록이자 역사서다. 처칠은 “두 차례 최악의 전쟁을 고위직에서 경험한 사람은 아마 내가 유일할 것”이라며 “실수를 성찰하고, 오류를 교정하고,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고 밝혔다. “도덕적인 사람들의 나약함이 사악한 사람들의 적의를 어떻게 강화시켰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설명이다.
맹목적 평화주의에 지배됐던 유럽
총 6권 5000여 쪽의 방대한 저작을 관통하는 정서는 안타까움이다. 처칠은 ‘공포와 피비린내 나는 포격에 기초한 독재체제(나치즘)의 등장’에도 세계 지도자들은 “불편한 현실과 마주하기를 거부하고, 국익을 무시한 채 대중적 인기만 갈망했다”고 전한다. 세계의 운명이 달린 그 중대한 시기에 영국 총리였던 볼드윈은 유럽 정세에 무지했다고 개탄했다.
유럽인들의 경계심은 나치 독일 지도자 히틀러의 능수능란한 수사에 무너졌다. 체코 수데텐 지역을 기습 점령한 히틀러는 “이것이 영토에 관한 내 마지막 요구”라며 할양해줄 것을 요구했다. 대재앙의 전초전이었다. 독일에 전력이 뒤지지 않던 체코는 항전 의지를 다짐했지만, 유럽 강국들은 ‘마지막 요구’라는 말을 믿고 사태를 봉합하는 데 급급했다. “전쟁을 감당할 자신과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의 참극을 겪은 당시 영국은 반전 분위기가 압도했다. 1차 대전 때 총리를 지낸 거물 정치인이었던 로이드 조지조차 이런 상황에 편승해 히틀러의 군사행동을 “베르사유 조약 위반이 아니다. 왜냐하면 (1차 대전 승전국들의) 도발행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변호했다. 영국의 대표적 사회주의자였던 노동당의 필립 스노든은 “히틀러가 제안했던 평화교섭이 무시됐다”며 그를 옹호하기까지 했다.
맹목적 평화주의도 파국으로 치달은 요인으로 꼽힌다. “독일이 국제연맹을 탈퇴했는데도 영국 노동당과 자유당은 ‘평화’를 들먹이며 군비 축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전쟁광과 유언비어 유포자로 몰아세웠다. 두 당은 앞으로 어떤 일이 전개될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호응에 의해 고무되고 있었다.”
“국민들 역시 전쟁을 피할 수 있게 됐다는 안도감에 안주했다”는 게 처칠의 통탄이다. 독일의 잇단 인접국 침략을 “옛 자국 영토를 되찾는 것일 뿐”이라며 감싸는 영국인이 태반이었다.
처칠은 ‘표’를 위해서라면 국가 존망의 문제마저 외면하는 정치꾼들의 존재도 개탄했다. ‘군비 확장 반대’를 슬로건으로 선거를 준비하던 대다수 정치인은 독일의 야망과 전쟁 준비를 인지하고도 침묵하고 부인했다.
‘평화로의 경도’는 뮌헨회담의 전말에서 확연해진다. 1938년 9월, 독일 뮌헨에서 히틀러와 회담하고 귀국한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열광하는 군중에게 “우리 시대의 평화가 왔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 푹 자라”고 연설했다. “수데텐을 넘겨주는 대가로 평화를 약속받았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불과 1년 뒤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함께 2차 대전의 막이 올랐다. “히틀러의 침략과 도발은 독일의 군사력이 뒷받침해서만이 아니라 프랑스와 영국의 분열과 소극적 태도, 미국의 고립정책이 부추겼다”는 게 처칠의 결론이다.
'철의 장막'이 민주주의 위협
《제2차 세계대전》은 감당하기 힘든 전장의 한복판에서 느낀 두려움도 그대로 전하고 있다. “전쟁 40일 만에 우리는 고립무원 상태가 됐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절체절명의 공격을 퍼부었다”며 공포감을 토로한다. 또 “일본은 정체를 모를 위협적 존재였다”며 “일본군의 폭격으로 영국 군함 두 척이 침몰한 때가 가장 충격적이었다”고 회고했다.
힘겨운 승리를 쟁취했지만, 처칠에게는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던 포츠담회담 기간에 열린 국내 총선에서 불의의 패배를 당했다. 그로 인해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재야에서도 그는 국제 정세에 대한 깊은 안목으로 질서 재편의 중심에 섰다. 1946년 3월 미국 웨스트민스터대 초청 강연에선 “전후 세계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고 있다”며 소련의 전면 부상이 부른 ‘철의 장막’ 문제를 제기해 큰 파장을 불렀다.
그러면서 그는 유럽합중국(United state of Europe)이라는 원대한 구상을 평화 해법으로 제시했다. 처칠의 유지(遺志)를 살려 탄생한 유럽연합(EU)에 균열을 낸 주인공이 브렉시트를 결행한 영국이라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 책은 서유럽 동유럽 소련 아시아, 태평양과 대서양에서 전개된 많은 전투들의 전개과정을 꼼꼼한 필체로 전달한다. 최악의 전쟁에 임하는 열강 지도자들의 심리와 고뇌를 인문학적 사유에 버무려 손에 잡힐 듯이 묘사했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