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남북경협보다 더 시급한 것들
어렵게 찾아온 남북한 정상 간 일련의 역사적인 행보가 한반도 경제 번영으로 연결되기를 바라는 심정은 누구나 한결같을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북한의 열악한 경제 상황을 획기적으로 개선시킬 천문학적인 투자다. 그러나 매 순간 시장의 냉혹한 평가를 받는 기업가라면 북한의 비핵화 없이 그런 대규모 투자를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북한은 경제 건설 의지를 과시하고자 한국 글로벌 기업 총수들의 평양행을 끌어냈지만 국제사회의 대북(對北) 제재가 해제되지 않는 한 그 어떤 남북경협도 시동조차 걸 수 없음을 알고 있는 총수들은 답답한 심정일 것이다. 북한의 비핵화 수사만 무성한 지금 남북경협은 도상설계 수준일 수밖에 없고, 한국엔 남북경협보다 더 급한 게 산적해 있다.

첫째,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성장잠재력을 끌어올리는 일이다. 한국 경제는 고용, 투자 등 주요 경제지표는 물론 소비심리와 기업 체감심리도 악화일로에 있다. 미국 등 선진국 경제는 활황세인데 한국만 역주행하고 있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 경제는 최대 호황을 누리면서 3% 넘는 성장률을 기대하고 있는데 미국의 12분의 1 규모인 한국 경제는 3% 성장도 힘겨워하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한국의 장기 성장 추세가 꽤 오래전부터 하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추세가 지속된다면 일자리 만들기, 복지 안전망 확충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북한의 철도·전력망 개선 등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남북경협이 어떻게 궤도를 이탈할 것인지도 짐작할 수 있다. 성장잠재력을 확충해야 세금에 의존하는 이 모든 중요한 일이 가능하고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문재인 정부에서 성장잠재력 확충에 대한 논의는 실종 상태다. 성장잠재력을 이야기하는 것이 ‘개발연대’로 돌아가자는 보수 우파의 문법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이념 과잉의 최대 유탄은 서민층에게 떨어질 것이란 점을 깨닫기 바란다. 지금 추세대로 성장잠재력이 추락한다면, 10년 주기로 찾아온다는 경제위기는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그 심각성을 이념의 색안경 때문에 인지하지 못한다면 역사의 평가는 냉혹할 것이다.

둘째, 발등의 불은 트럼프발(發) 자동차 25% 관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냉전시대의 유산인 1962년 무역확장법의 ‘국가안보 조항’을 꺼내 들고, 수입자동차가 미국의 안보를 위협한다며 현행 2.5%인 자동차 수입관세를 25%로 올리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번에 평양행이 아니라 워싱턴행을 택한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은 이 ‘관세 날벼락’을 피하려고 지금 동분서주하고 있다.

한국은 미국의 군사동맹이고,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경제동맹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국산 자동차가 미국의 안보를 위협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다른 목표를 위한 협상전략일까 아니면 진짜 한국을 그렇게 인식하고 있어서일까. 청와대는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강력한 신뢰를 구축하고 있다고 하지만 워싱턴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왜 이런 식으로 나타날까. 트럼프의 자동차 25% 관세폭탄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정의선 부회장은 현대차의 대미 수출을 포기하고 미국에 제2 공장을 짓겠다고 결심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규모 9의 지진 같은 충격파가 한국 경제를 뒤흔들 것이다.

최악을 모면하기 위해 한국 정부는 연간 자동차 수출물량을 제한하는 조치에 합의할 수도 있다(연초 미국이 철강에 25% 관세를 부과하려 했을 때 한국은 지난 3년간 수출물량의 평균 70%까지만 수출하기로 합의했다). 자동차산업의 전후방 연관 효과를 고려한다면 이 경우에도 고용 한파는 피할 수 없다.

한·미 FTA 개정 협상까지 했는데도 자동차에 25% 관세폭탄을 맞는다면 한·미 FTA 무용론이 거세게 일 것이고, 한·미동맹도 위기 국면으로 내몰릴 것이다. 흔들리는 한·미동맹으로 북한의 비핵화를 이룰 수 있을까. 북한 비핵화 없이는 남북경협도 있을 수 없다. 성장잠재력 확충과 더욱 굳건한 한·미동맹 없이는 이 중요한 일을 시작해볼 기회조차 잡을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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