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사진=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불황일 때가 바로 기회입니다. 역사가 깊은 토종 브랜드를 살리고 키워야죠. 그거야말로 제가 잘할 수 있는 겁니다.”

최병오 패션그룹형지 회장은 “위기가 기회”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창업 이후 46년 동안 수많은 위기를 겪으면서 이를 체득했다. 패션업계가 모두 허리끈을 조여 매는 불황에도 최 회장은 큰돈이 들어가는 복합쇼핑몰을 짓겠다고 했다. 부도를 코앞에 둔 신발 전문업체 에스콰이아를 인수한다고 했을 때도 주변에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하지만 그는 “내 고향 부산 하단에 주민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을 짓겠다는 약속을 꼭 지키겠다”며 지난해 쇼핑몰 문을 열었다. 1년여가 지난 지금 이 쇼핑몰 아트몰링은 하단지역 주민이 애용하는 ‘만남의 장소’가 됐다. 영화관 CGV 등 젊은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시설을 갖춘 덕분이다. 적자였던 에스콰이아도 2015년 인수한 뒤 비효율성을 개선해 올해 2분기엔 흑자로 돌아섰다. 그의 결단력과 추진력이 돋보이는 순간들이다.

최 회장의 ‘창업 성공 스토리’는 추진력과 역발상, 도전으로 요약된다. 위기의 순간 재빨리 결단하고 강력하게 추진해 결국 성공으로 이끌어낸 경험이 하나씩 쌓여 그의 밑천이 됐다. 20대엔 삼촌의 페인트가게를 인수해 남다른 사업수완을 발휘했지만 경쟁사가 방수페인트 개발에 성공하는 바람에 사업을 접어야 했다. 그때 빨리 상경하겠다고 결단해 동대문시장에서 옷장사를 시작했다. 붙임성이 좋아 옷을 잘 팔았지만 셈에는 약해 결국 어음이 부도처리됐다. 그 순간에도 그는 집과 차를 팔아 빚을 갚고 재기를 준비했다. 위기의 순간마다 또 다른 기회를 찾아나선 것이다.

당시 최 회장 눈에 들어온 건 미국 브랜드 ‘비버리힐스 폴로클럽’. 이 브랜드의 국내 여성복 라이선스를 따내 ‘대박’을 터뜨렸다. 하지만 계약기간 1년이 끝나자 본사에서 기간연장을 해주지 않았다. 또 다른 브랜드를 찾던 중 악어 모양의 로고가 박힌 ‘크로커다일맨’을 보고 ‘크로커다일레이디’를 만들겠다며 싱가포르 회사를 찾아갔다.

“국민복이 될 만한 편하고 고급스러운 옷을 만드는 건 내 전문”이라며 크로커다일 오너인 탄 한신 회장을 설득해냈다. 그렇게 1996년 시작한 크로커다일레이디는 연매출 3000억원대를 올리는 패션그룹형지의 대표 브랜드로 성장했다. 최 회장의 결단력과 추진력이 이끌어낸 성과다.

그는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크로커다일레이디, 샤트렌, 올리비아하슬러 등 형지의 대표 여성복 브랜드를 시작하면서 백화점보다 가두점에, 서울보다 지방에 먼저 매장을 늘리는 전략을 폈다. 역발상 마케팅이다. “합리적인 가격과 좋은 품질, 여기에 백화점에서 해주는 서비스를 더하면 분명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최 회장은 확신했다. 소비자에게 어울릴 만한 옷을 추천해주고 사이즈 조언도 해주며 백화점 점원처럼 상냥하게 대하자 반응이 곧장 왔다. 대리점마다 단골 고객이 생겨났고 크로커다일레이디 옷만 입겠다는 소비자가 하나둘 늘었다. 누구나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사이즈와 색상, 디자인을 택한 건 기본이었다. ‘국민복’을 만들겠다는 최 회장의 의지가 실현된 것이다.

창업 40여 년 만에 연매출 1조원대 기업을 일궜지만 최 회장은 안주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새로운 사업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2016년 프랑스 디자이너 브랜드 ‘까스텔바작’을 인수한 건 글로벌 패션기업을 향한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었다. 패션그룹형지는 2020년 완공 목표로 인천 송도에 글로벌패션타운을 조성하고 있다. 본사를 옮기고 이곳을 글로벌 패션허브로 키우겠다는 구상이다. 골프웨어로 시작한 까스텔바작을 라이프웨어, 여행용 가방, 화장품, 신발 등 다양한 품목으로 확대하려는 것도 글로벌 구상을 위한 것이다. 최 회장은 최근 까스텔바작의 중국 유통망을 확보하기 위해 현지에 다녀왔고 미국 신발 전문업체와도 계약을 맺었다. “까스텔바작의 스토리와 디자인을 활용해 이젠 한국을 넘어 해외로 시장을 넓히겠다”는 도전을 시작한 것이다.

■최병오 회장 약력

△1953년 부산 출생
△1971년 부산고등기술학교 전자과 졸업
△1982년 서울 동대문시장 ‘크라운’ 브랜드 창업
△1994년 형지물산(패션그룹형지 전신) 설립
△1996년 크로커다일레이디 라이선스 사업
△2006년 샤트렌 론칭
△2011년 한국의류산업협회 회장
△2012년 남성복업체 우성I&C 인수
△2015년 에스콰이아 인수
△2016년 프랑스 브랜드 까스텔바작 인수
△2018년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최병오 회장은…

공고 졸업 후 무작정 상경
동대문에 3.3㎡남짓 옷 매장 열어
'크라운' 브랜드 바지로 대박

될성부른 옷 보는 눈썰미 탁월
'올리비아하슬러' '라젤로' 등 내놔

남성복·신발 등으로 영역 확대
"반걸음 먼저 움직여야 성공"


최병오 패션그룹형지 회장은 부산 하단동에서 6남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큰 규모의 건축자재용 횟가루 제조공장을 운영하던 할아버지, 이를 물려받은 아버지 덕에 넉넉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중학교 1학년 때 간암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가세가 기울었고, 그도 방황했다. 마도로스를 꿈꾸며 부산해양고에 지원했다가 낙방했다.

부산고등기술학교 전자과를 졸업한 최 회장을 눈여겨본 건 페인트가게를 운영하던 막내 삼촌이었다. 두둑한 배짱과 사업가 기질이 꼭 아버지를 빼닮았던 것이다. 삼촌 일을 돕던 최 회장은 사람을 상대하며 물건을 파는 일에 매료됐다. 삼촌이 세상을 떠난 1972년 아예 페인트대리점을 인수했다. 그러나 방수페인트의 등장으로 일반페인트를 주로 판매하던 사업이 기울었고, 무작정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27세이던 1979년의 일이다.

최 회장의 첫 사업 아이템은 여성용 바지였다. 동대문시장에서 3.3㎡(1평) 남짓한 매장을 얻고 ‘크라운’이라는 브랜드를 단 바지를 팔았다. 허리에 고무줄을 넣어 편하면서 가격은 동대문시장 옷처럼 저렴했다. 메이커 옷이 없던 동대문시장에서 크라운 바지는 불티나게 팔렸다. 30~40대 여성들 사이에서 선풍적 인기를 끈 덕분에 그는 사업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어음 부도 등 몇 번의 위기를 겪었지만 그는 그때마다 ‘브랜드의 힘’을 믿고 재기를 시도했다. 여성복 ‘비버리힐스 폴로클럽’의 라이선스를 따낸 것도, ‘크로커다일맨’이 국내에서 잘되는 걸 본 뒤 ‘크로커다일레이디’ 라이선스 계약을 맺은 것도 최 회장 특유의 눈썰미 덕분이었다. 그는 잘될 법한 옷을 알아보는 남다른 시각이 있었다. 크로커다일레이디의 인기 덕분에 샤트렌(2006년), 올리비아하슬러(2007년), 라젤로(2008년) 등 여성복 브랜드를 잇달아 시장에 내놓을 수 있었다.

여성복 기반으로 회사를 키운 최 회장은 2012년 남성복 전문업체 우성I&C(현 형지I&C)를 인수하며 영역 확장에 나섰다. ‘예작’ ‘본’ 등 남성복 브랜드를 확보한 그는 2013년 교복 업체 에리트베이직(현 형지엘리트)과 패션쇼핑몰 바우하우스(현 아트몰링 장안점)를 사들였다. 2015년엔 부도 직전까지 몰렸던 토종 신발 전문업체 에스콰이아를 인수해 조직을 혁신하고 내실을 다졌다. 그 결과 올해 2분기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2016년 프랑스 디자이너 브랜드 까스텔바작을 인수하자 패션업계는 그의 배짱에 또 한번 놀랐다.

요즘도 새벽 5시에 일어나는 최 회장은 “남보다 반 발짝 더 먼저 움직여야 성공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그는 “까스텔바작을 통해 글로벌 패션 회사로 발돋움하겠다”며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민지혜 기자 sp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