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시대 일본에 개설된 사설 서당 데라코야(寺子屋)에서 공부하는 서민의 자제들.  /창비 제공
에도시대 일본에 개설된 사설 서당 데라코야(寺子屋)에서 공부하는 서민의 자제들. /창비 제공
조선이 일본의 막부(幕府) 장군에게 파견했던 외교사절인 조선통신사들의 눈에 비친 일본 무사들의 행태는 충격적이었다. 1607년 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경섬은 “남자는 항상 대·중·소의 칼 셋을 차고 다닌다. 큰 것은 남을 죽이는 데 쓰고, 중간 것은 남을 막는 데 쓰고, 작은 것은 자살하는 데 쓴다”고 했다. 1596년 명나라 사절들과 일본을 방문한 황신의 사행록에는 “삶을 가볍게 여기고 협기(俠氣)를 마음대로 부리며, 병들어 죽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하고 싸우다 죽는 것을 영예로 여긴다”고 전했다.

[책마을] 日의 잔혹함에 놀란 조선 선비들, 기술력에 더 놀랐다
《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는 유교를 숭상하며 문치(文治)사회를 추구했던 조선 선비들의 눈에 비친 일본의 모습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준다.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부터 1764년까지 170여 년간 조선 선비들이 일본에 다녀와서 남긴 견문기 35종을 바탕으로 일본에 대한 조선의 인식 변화를 세심하게 추적한다. 저자는 재일동포 3세로 서울대에서 조선통신사 관련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박상휘 중국 중산대 국제번역학원 특빙연구원이다.

저자는 수백 년의 전국시대를 거치며 살기가 가득했던 일본 사회를 바라보는 조선 선비들의 내면에 천착한다. 문학 교류에 치중했던 기존 연구들의 한계를 넘어 이념, 제도, 풍습, 종교, 문자생활, 기술 등에 이르기까지 조선 선비들의 눈을 통해 일본 사회 구석구석을 탐색한다.

선비들이 가장 당혹스러워한 것은 무사 중심의 일본 사회에 만연한 죽음의 문화, 죽음의 일상화였다. 가장 혐오감을 느낀 대상은 타메시기리(試し斬り)와 할복이었다. 타메시기리란 칼이 잘 드는지 확인하기 위해 시체를 시험 대상으로 삼아 베어보는 것. 통신사들이 남긴 사행록에는 ‘시검(試劍)’에 관한 내용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이 같은 죽음의 문화는 에도시대에 접어들어 평화기가 지속되면서 점차 사라졌고 무사에 대한 조선 문사들의 인식도 크게 달라졌다. 1763~1764년 계미통신사로 다녀온 원중거는 일본인이 검술에 능하지만 공적인 자리에서 칼을 칼집에서 뽑는 것은 엄격히 금지돼 있었다고 전했다. 삶을 가벼이 여기고 죽음을 찬탄하는 문화는 전쟁이 400년 이상 지속된 전국시대가 남긴 유산일 뿐 일본인의 본성은 아니라는 얘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은 조선에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와 함께 씻을 수 없는 정신적 상처를 남겼다. 지금까지도 도요토미와 일본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을 버리기 어려운 이유다. 이런 마음은 조선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도요토미가 죽고 에도막부를 개창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란을 ‘평적(平賊)이 저지른 악’이라고 했다. 명분 없는 전쟁으로 조선은 물론 일본인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입힌 도요토미를 일본인도 원망했으며 그 결과 에도시대의 평화가 유지됐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제주에서 열리는 해군의 관함식에 욱일기를 달고 오겠다는 현대의 일본인은 에도시대의 조상들만도 못한 것인지….

통신사들이 남긴 기록을 통사적으로 살펴보면 조선은 우월하고 일본은 미개했다는 이분법에서 벗어나게 된다. 조선 사절들은 일본의 제도와 통치술, 기술, 문화 등을 세세히 살폈고 본받을 점이 있는지 궁리했다. 예컨대 평소엔 농사를 짓다가 전쟁이 나면 군사로 동원하는 병농일치제였던 조선과 달리 일본은 군사와 농민을 분리해 운영했다. 힘이 있는 장정은 직업군인이 되고, 농사는 나머지 평민이 짓도록 했다. 주요 관직은 종신제 혹은 세습제로 함으로써 업무의 안정성과 효율성을 높인 점, 사람들이 분수를 지켜 생업에 성실하고 절제하며 살아가는 점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특히 17~18세기 일본의 무역과 기술력은 주목할 만했다. 무역항 나가사키를 통해 대외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한 일본은 일찍이 선진 문물을 수용했다. 특히 정교하고 탄탄한 기술력은 조선을 앞질렀다.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이 연전연승했던 것은 견고한 거북선과 판옥선이 날래기는 하지만 약했던 왜선을 부쉈기 때문이다. 하지만 18세기 들어 전세는 완전히 역전됐다. 1763년 일본에 다녀온 남옥은 ‘일관기(日觀記)’에서 “섬나라인지라 배를 마치 말처럼 부린다. 배의 제도가 지극히 가벼우면서도 견고해서 실 한올만큼의 틈도 없으므로…그래서 투박하고 엉성한 우리 배를 보면 모두 비웃는다. 그들과는 가히 육지에서는 싸울 수 있으나 물에서는 싸울 수 없다.” 하천에서 물을 끌어올려 바로 부엌으로 대주는 수차는 조선 사절들의 감탄사를 자아냈다.

초기의 사행원들은 일본에서 한자, 한문을 쓸 줄 아는 사람은 승려밖에 없다고 파악했다. 하지만 에도시대 이후 도쿠가와 막부가 유교를 장려하면서 각지에 학교를 세우고 문자 사용 인구가 급증했다. 1764년에 이르면 서민까지도 사절들과 필담을 나누고 한시를 주고받을 정도로 문자생활이 확산되고 수준 높은 문사도 등장했다. 한자라는 같은 문자를 사용하고 있다는 인식과 상호교류는 문화적 유대와 평화 공존의 꿈도 꾸게 했다. 이런 경험을 살려 양국이 ‘호생(好生)’의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건 저자만의 희망일까.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