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정희 기자 ljh9947@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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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까지만 해도 회사가 곧 망할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많았습니다.”

다이소 창업자인 야노 히로타케 회장은 지난 4월 일본 경제 주간지 다이아몬드에 이같이 털어놨다. 1972년 트럭 가게로 시작해 46년간 회사를 이끌어온 야노 회장은 “바닥이 얕은 이런 사업이 오래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여겼다”고 했다.

이런 위기감은 다이소를 성장시킨 원동력이었다. 그는 100엔(약 1000원)가량의 저렴한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사업 모델로 큰 성공을 일궜다. 다이소는 지난해 기준 일본에 3150개, 해외 26개국에 1900개 점포를 운영하는 거대 유통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한국의 1290개 다이소 매장은 한국 기업인 아성다이소가 독자 운영하고 있다. 일본 다이소가 아성다이소 지분 34.21%를 보유하고 있고 다이소 브랜드도 함께 쓰고 있지만 한국과 일본 다이소는 별개 회사다.

“밥 굶지 않는 것에 감사하자” 다짐

다이소는 예전 회사 모습을 담은 사진이 별로 없다. 야노 회장은 회사가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다면 모를까 곧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에 사진 찍을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고 전했다. 예전 회사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내달라는 언론사 요청이 많지만 응하지 못하는 이유다.

야노 회장이 다이소의 사업 전망이 어둡게 본 까닭은 실패를 반복했던 경험 탓이었다. 그는 하는 일마다 성과가 없었고 지독히 어려운 생활을 했다.

야노 회장은 1943년 중국 베이징에서 의사 집안 아들로 태어났다. 히로시마 출신인 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베이징의 한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형들은 아버지를 따라 의사가 됐지만 그는 의학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중 권투에 빠지게 됐고 1964년 도쿄 올림픽에 선수로 출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계에 부딪혀 운동을 그만두고 대학에 진학했고 무작정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20년 뒤엔 어느 기업의 사장쯤 될 수 있겠지”라는 막연한 생각만 했다고 그는 술회했다.

야노 회장은 결혼 후 히로시마에서 장인이 하던 방어 양식장을 물려받았다. 처음 운영하게 된 사업은 쉽지 않았다. 키우던 방어들이 죽어나갈 때마다 돈을 바다에 버리는 심정이었다. 적자만 계속 쌓여갔다. 야노 회장은 아버지와 형들에게 700만엔을 빌렸다. 현재 가치로 1억엔가량되는 거액이었다. 하지만 양식장 경영은 갈수록 악화됐고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야반도주를 선택했다.

도쿄로 도망 온 그는 책 세일즈맨과 볼링장 아르바이트 등 9개 직업을 전전했다. 친구의 소개를 받아 백과사전 영업사원이 됐지만 거의 팔지 못했다. 매일 화장실 거울 앞에서 30분씩 자기 암시를 걸며 유능한 세일즈맨이 되려고 노력했지만 판매 순위는 전체 직원 30명 중 27등에 불과했다.

야노 회장은 “밥 굶지 않는 것에 감사하자고 스스로를 타이르는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양식장 사업이 망할 때까지만 해도 단순히 운이 없기 때문이라고 여겼지만 이때부터 능력도 없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히로시마로 되돌아간 그는 일용직 노동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며 돈을 벌었다. 1972년 종잣돈을 바탕으로 ‘야노 상점’을 열었다. 2t 트럭에 잡화를 싣고 다니는 이동 판매점이었다. 이름뿐인 상점이었지만 가족이 입에 풀칠할 돈은 마련할 수 있었다. 이때도 갑작스러운 화재로 물건이 다 타버리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귀찮음이 만든 다이소 신화

어느날 한 손님이 물건을 고르며 얼마냐고 값을 물었다. 전표를 확인하기 귀찮았던 그는 무심결에 “100엔입니다”고 답했다. 옆에 있던 다른 손님이 또 묻자 마찬가지로 “100엔이요”라고 했다. 만족해하는 손님들의 얼굴을 보며 그는 100엔의 힘에 대해 깨닫게 됐다. 다이소의 역사가 시작된 순간이다. 상품마다 매입가를 기준으로 판매가를 정하기 귀찮아 100엔이라고 대답한 것이 뜻밖에도 사업 성공의 단초가 된 것이다.

야노 회장은 히로시마의 대형 마트 내 매장을 임대해 100엔숍을 꾸렸다. 입지가 좋은 마트 안에 매장이 있었기에 손님을 찾아다니는 수고를 덜었다. “싼 게 비지떡”이라며 비꼬는 손님의 말에 화가 난 그는 상품의 질을 높여갔고 하루 100만엔의 매출을 올려 마트 측을 놀라게 했다.

야노 회장은 1997년 야노 상점을 법인화해 다이소산업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사세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부터 일본 경제가 장기 침체에 빠진 탓에 지갑을 닫은 소비자들은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 대신 100엔숍으로 몰려들었다. 우후죽순처럼 불어난 매장은 1999년에는 1200개가 됐고 2002년 전체 매장 수는 2400개, 2010년에는 3000개에 달했다.

다이소는 지난해 기준 매출이 4200억엔에 달한다. 현재 7만 개 이상의 상품을 판매하고 있으며 매달 500~700개의 신상품을 투입한다. 지난해 기준 전 세계에서 일본 다이소 매장을 찾은 고객이 10억 명으로 추산된다.

야노 회장은 처음 트럭 장사를 시작했을 때 아내에게 얘기했던 “연매출 1억엔의 회사를 만들겠다”는 다짐과 대학 시절 “20년 뒤엔 사장이 되겠다”는 다소 허황된 꿈을 모두 실현하게 됐다. 100엔숍인 세리아, 캔두, 와츠 등 경쟁자들이 추격하고 있지만 다이소는 여전히 시장 1위를 달리고 있다.

야노 회장은 지금도 스스로를 운 없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그는 주간지 다이아몬드에 “운도 없고 능력도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노력의 원동력이 된다”며 “지금까지 내 삶이 그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운 없는 행복이란 말을 좋아한다”고 했다. 지난 7월 삿포로에서 열린 한 강연회에서는 “(과거 사업이 잘돼) 야반도주하지 않고 백과사전 영업에도 성공했다면 지금의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라며 “그 당시 쓴맛을 보고 자신감을 잃었던 게 결과적으로 도움이 됐다”고 회상했다.

만화캐릭터 도라에몽 같은 회장님

대기업 회장이라는 직함이 주는 무게와 달리 야노 회장은 솔직하면서도 다소 엉뚱한 언행으로 주목받아왔다. 니혼게이자이비즈니스는 “야노 회장은 만화 캐릭터 도라에몽처럼 다양한 물건을 꺼내 상대를 놀라게 하거나 웃게 만든다”고 전했다. 그는 거래처 사람을 만나 명함을 교환할 때면 다이소에서 파는 장난감 커터칼을 주머니에서 꺼내 손가락을 자르는 장난을 치기도 한다. 직원들이나 제조업체 담당자들을 만날 때도 다이소에서 판매하는 상품들로 분위기를 이끈다.

자신감 넘치는 발언을 이어가는 다른 최고경영자(CEO)들과 달리 몸을 낮추는 언행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니혼게이자이비즈니스 인터뷰에서 2012년 매장 디자인을 젊은 여성 취향에 맞춰 재단장한 이유를 묻는 질문을 받자 “직원들이 정한 것으로 내 의견은 모두 무시됐다”며 “내 생각은 과거의 이론이라 지금 세상에서는 쓸모가 없다”고 답하기도 했다. “매장 분위기가 활발한 것 같다”는 말에는 “생각이 늙어버린 탓에 되도록 말을 아끼고 있다. 대신 직원들이 자유롭게 일하는 분위기를 만드는데 집중하고 있다”고 답했다.

김형규 기자 k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