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파도가 치는 해변,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1980년대 디스코장, 새하얀 모래가 깔린 경마장, 루브르박물관 피라미드에 설치한 통유리….

명품 브랜드들이 내년 봄·여름 여성복을 선보이기 위해 선택한 파리 패션쇼 무대들이다. 지난달 25일부터 이달 2일까지 파리에서 열린 ‘2019 봄·여름 패션위크’에서는 예년보다 더 우아한 디자인과 화려한 색감, 속이 들여다보이는 소재 등 ‘페미닌(feminine) 패션’이 핵심 키워드로 등장했다. 이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무대를 꾸미는 데 수십억원을 쓸 정도로 콘셉트를 보여주는 데 공을 들였다.

더 화려하고 우아하게

샤넬은 지난 2일 그랑팔레 무대를 낭만적인 해변가로 변신시켰다. 매시즌 콘셉트에 따라 우주정거장, 공항, 폭포, 숲 등으로 무대를 꾸며온 샤넬은 ‘잔잔한 파도가 치는 해변을 맨발로 거니는 여성들’을 무대에 세웠다. 특유의 트위드 소재로 짠 재킷과 치마, 실크 블라우스, 챙이 넓은 모자와 투명 소재로 만든 샌들은 발랄하고 우아한 모델들을 더 돋보이게 했다.

무엇보다 색상이 더 화려해졌다. 과거에는 비슷한 색을 매치하는 ‘톤온톤’이 트렌드였지만 점점 과감해져 이젠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색상을 여럿 섞어쓰는 게 대세가 됐다. 그린과 레드, 브라운과 블루에 핫핑크 등 여러 색을 함께 쓰는 것은 모든 브랜드의 공통점이었다. 톰브라운은 양쪽 색이 다른 부츠를 신고 5~6가지 색이 들어간 의상을 입은 모델을 등장시켰다. 에르메스, 스텔라 매카트니, 끌로에, 꼼데가르송 등도 화려한 색상의 옷을 선보였다. 뉴욕타임스는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여성들의 욕망이 컬러풀 패션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속이 들여다보이는 시스루 패션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몸매가 잘 드러나지 않는 통이 큰 옷이 한동안 인기였지만, 내년 봄·여름에는 속살이 살짝 비치는 시폰, 실루엣을 강조하는 실크 등 몸매를 드러낼 수 있는 옷이 유행할 것으로 보인다. 디올, 생로랑, 루이비통, 소니아 리키엘 등은 속이 들여다보이는 시폰, 몸매를 강조하는 실크와 그물 패턴의 옷을 선보였다. 운동으로 건강하게 가꾼 몸매가 트렌드로 자리 잡으면서 건강미를 돋보이게 하는 옷도 함께 인기를 끌 것이란 전망이다.

“브랜드 정체성이 성패의 핵심”

‘페미닌 패션’의 간판주자였던 프랑스 브랜드 셀린느는 정체성 논란에 휩싸였다. 올봄 셀린느의 디자이너로 합류한 에디 슬리먼은 이번 파리패션위크에서 그의 첫 셀린느 무대를 선보여 패션업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그는 생로랑, 디올옴므의 디자이너로서 두 브랜드를 히트시킨 화제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무대에서는 “모던한 생로랑 같다” “여성스러웠던 셀린느가 사라졌다” “남성복 같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뉴욕타임스의 패션수석평론가인 버네사 프리드먼은 “생로랑처럼 셀린느도 상업적 성공을 기대했겠지만 그냥 슬리먼 개인의 패션쇼 같았다”고 혹평했다. 셀린느의 정체성을 살리지 못한 탓이었다.

명품업계에서는 디자이너가 누구냐에 따라 브랜드 성패가 크게 갈리곤 한다. 1982년부터 샤넬의 수석디자이너를 맡고 있는 84세의 카를 라거펠트는 매년 조금씩 진화하면서도 ‘샤넬스러운’ 옷을 선보여 박수를 받고 있다. 5년 전 루이비통 여성복의 디자이너로 들어갔다가 올해 재계약한 니콜라 제스키에르도 여행에 초점을 맞춘 브랜드 콘셉트와 여성미를 잘 조화시킨다는 평가를 받는다.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직접 진두지휘하고 있는 이자벨 마랑, 소니아 리키엘, 스텔라 매카트니 등도 고유의 브랜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영국의 가디언지는 “에르메스의 우아한 펜슬스커트, 발렌티노의 브이넥 맥시드레스 등 여성미를 극대화한 옷이 내년 봄 옷장을 가득 채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파리=민지혜 기자 sp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