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야기 (31)] 전상국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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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은주 선생님과 함께하는 한국문학 산책
공산군 앞잡이가 된 억구가
득수를 죽이고
득수 동생인 득칠이는
억구 아버지에 보복하고
전후에 득칠을 만난
억구는 반가움을 뒤로 한 채
다시 그를 보복하고
억구를 체포하지 않고
풀어준 형사는
어릴 적 구하지 못했던
토끼를 떠올렸을까?
공산군 앞잡이가 된 억구가
득수를 죽이고
득수 동생인 득칠이는
억구 아버지에 보복하고
전후에 득칠을 만난
억구는 반가움을 뒤로 한 채
다시 그를 보복하고
억구를 체포하지 않고
풀어준 형사는
어릴 적 구하지 못했던
토끼를 떠올렸을까?
![[문학이야기 (31)] 전상국 《동행》](https://img.hankyung.com/photo/201810/AA.18023288.1.jpg)
어릴 때 공포영화가 무서웠다. 뱀파이어와 좀비와 악령과 심령술사가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초자연의 세계. 나이를 먹으면서 진정한 삶의 공포는 평범한 인간의 평범한 일상에 드리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대체로 삶은 행복하고 인간은 아름답다는 믿음과 신화가 배반당하는 순간에 찾아온다. 얄팍한 편법이 우직한 정공법을 이기는 것을 목도하는 순간, 응원하던 사랑이 외풍에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는 순간, 존경했던 사람이 더 이상 그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된 순간, 혈육의 정조차 절대가 아님을 신문 사회면에서 확인하는 순간. 이런 순간들을 겪고 나면 더 이상 해맑은 얼굴로 깔깔대며 살기는 힘들어진다. 청소년들이여, 어른들의 얼굴이 찌들어 버린 것은 이런 연유다.
![[문학이야기 (31)] 전상국 《동행》](https://img.hankyung.com/photo/201810/AA.16086172.1.jpg)
이념과 살육의 소용돌이
눈 덮인 강원도 산골, 형사와 살인범이 서로 신분을 감춘 채 밤의 눈길을 함께 걷는다. 키가 큰 사내는 형사고 작은 사내는 살인범이다. 힘겹게 개울을 건너고 언 발로 산비탈을 오르는 여정에서 둘은 자연스레 어린 시절 이야기를 서로에게 들려준다. 키 작은 사내 억구는 어린 시절 자신을 멸시하는 동네 친구 득수의 손을 물어뜯은 벌로 광에 갇힌 경험이 있다. 이후 그는 추위와 어둠에 대한 깊은 공포를 갖게 된다. 키 큰 사내 형사는 어린 시절 가엾은 토끼 새끼를 구하고 싶었지만 용기를 내지 못하여 상심한 경험이 있다. 억구는 전쟁 때 공산군 앞잡이가 되어 감투를 얻어 쓰고 졸지에 마을의 권력자가 되었으며 이념과 살육의 소용돌이 속에서 득수를 죽인다. 그러나 이후 국군이 마을에 들어와 권력 관계가 반전되자 득수의 동생 득칠에게 보복을 당한다. 아버지가 득칠의 죽창에 찔려 죽음을 당한 것이다. 도망치느라 아버지를 지키지 못한 억구는 내내 죄책감에 시달렸고 또 어린 시절 광에 갇힌 경험에서 비롯된 감금의 공포 때문에 자수도 하지 못한다. 풍파 속에서 서른여섯이 된 억구는 우연히 득칠을 만났고 결국 그를 죽이고 만다. 그리고 아버지를 찾아가는 중이다. 아버지가 잠든 구듬치 고개에서 삶을 마감할 작정으로. 억구의 이야기를 들은 형사는 억구를 체포하지 않는다. 수갑 대신 담뱃갑을 건네며 하루 한 개씩만 피우라고 말한다. 억구의 허탈한 웃음이 터져나오는 산속 아직 조용히 눈이 비껴 내린다.
어릴 적 토끼를 살리지 못한 형사
억구가 우연히 득칠과 재회했을 때 둘은 왈칵 반가움을 느낀다. 반가움에 술까지 같이 마신다. 그리고 억구는 득칠이 아버지를 선대조 산소에 모시고 벌초까지 매년 해 왔다는 사실에 고마움을 느낀다. 이 작품에서 가장 큰 공포를 느낀 장면이다. 이 상황에서 반가움이라니. 고마움이라니. 이 둘에게 상대는 나의 혈육을 죽인 원수인 동시에 함께 자란 애틋한 동기이다. 자신이 죽인 친구 아버지의 묘를 벌초하는 삶. 반가움을 뚫고 되살아난 분노로 친구를 살해하는 삶. 인간의 생에 가장 큰 공포를 선사하는 것은 역시 전쟁이다.
손은주 < 서울사대부고 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