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재정 지출을 대폭 확대한 이탈리아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 정부의 내년 예산안에 퇴짜를 놨다. EU가 회원국 예산안을 거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정부는 지출 계획을 강행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있어 파장이 적지 않을 전망이다.
EU·이탈리아 '퍼주기 예산' 정면충돌…금융시장 '태풍의 눈'
◆재정위기 부르는 선심성 지출안

EU 집행위원회는 23일(현지시간) 이탈리아가 제출한 예산안을 거부하고 3주 안에 수정안을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발디스 돔브로브스키스 EU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은 “이탈리아가 EU 권고를 심각하게 어겼다”며 예산안 수정을 요구했다. EU는 회원국에 재정적자 규모를 국내총생산(GDP)의 3% 이내로 관리하도록 하고 있다. 이탈리아 예산안에 설정된 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은 2.4%로 EU가 정한 상한선엔 못 미치지만 전임 정부가 설정한 목표 0.8%를 크게 웃돈다.

이탈리아 재정적자가 원래 계획보다 증가한 것은 포퓰리즘 성향의 오성운동과 동맹 연립정부가 복지정책 등 재정 지출을 대폭 늘리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저소득층에 월 780유로(약 100만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고 연금수령 연령을 낮추기로 했다.

재정지출 확대와 함께 감세를 추진하면서 재정적자 폭은 더 커졌다. 재정지출을 과감하게 늘려 경제성장률을 높이고 국가 부채를 줄이겠다는 것이 이탈리아 정부의 주장이다. 돔브로브스키스 부위원장은 “재정적자 확대를 정당화하려는 이탈리아의 시도는 설득력이 없다”고 비판했다. EU는 또 이탈리아 예산안이 지나치게 낙관적인 경제성장 전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글로벌 금융시장에선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131%에 달하는 이탈리아가 재정적자를 늘리면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재정위기가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재정갈등 지속 땐 금융시장에 충격파

이탈리아는 EU의 거부에도 예산안을 수정할 의사가 없다는 견해를 거듭 밝혔다. 이탈리아 정부 실세인 마테오 살비니 부총리 겸 내무장관은 “EU가 거부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우리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EU는 우리 국민을 공격하고 있다”며 “이번 결정으로 이탈리아에서 EU의 인기는 더욱 떨어질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탈리아 정부가 3주 안에 새 예산안을 제출하라는 요구에 따르지 않으면 EU는 규정에 따라 이탈리아 GDP의 최대 0.2%까지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가 끝까지 EU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제재할 수단은 마땅치 않다.

EU와 이탈리아의 갈등이 지속되면서 금융시장 불안이 커질 전망이다. 이날 이탈리아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연 3.59%로 전날보다 0.11%포인트 상승했다. 이탈리아 국채 가치가 하락했다는 의미다. 앞서 국제 신용평가기관 무디스는 이탈리아의 신용등급을 투기등급 바로 위인 ‘Baa3’로 강등했다.

주세페 콘테 이탈리아 총리는 EU와 유로존 탈퇴는 추진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사설에서 “양측의 갈등엔 재정원칙뿐 아니라 정치적 의도도 깔려 있다”고 지적했다. 이탈리아 포퓰리즘 정권이 반(反)EU를 앞세워 내년 5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극우파 의석 확대를 노리고 있다는 해석이다. EU와 각을 세우면서 이탈리아 내 반EU 여론을 결집하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 살비니 부총리가 이끄는 극우정당 동맹은 지난 21일 이탈리아 북부 자치주인 트렌티노-알토 아디제에서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승리했다.

추가영 기자 gych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