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남부 하이위컴에 사는 70대 여성 실비아 마시는 얼마 전 집 뒤뜰 계단에서 넘어져 골반을 다쳤다. 남편 존 마시는 응급 전화번호인 999로 전화를 걸어 구급차를 보내 달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구급차가 부족해 보내줄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여러 번 거듭해 전화를 걸었지만 마찬가지였다. 구급차는 3시간 반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영국은 국민보건서비스(NHS)를 통해 전 국민에게 무상의료를 제공한다. 그러나 의료 서비스의 질은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돈이 적게 드는 것도 아니다. NHS엔 막대한 국민 세금이 투입된다. 의료 서비스는 가격탄력성(가격 하락 시 수요가 증가하는 정도)이 높아 무상으로 제공하면 수요가 크게 증가하는 데다 급속한 고령화로 만성질환을 앓는 노년층도 급증한 탓이다. 이제 NHS는 돈은 많이 들고 의료 서비스는 형편없는 ‘밑 빠진 독’이 됐다.
공짜 의료에 고령화 쓰나미까지…재정 바닥 英, 구급차 부르면 4시간
◆고령화에 재정과 서비스 ‘바닥’

올해 NHS 예산은 1500억파운드(약 226조원) 수준이다. 전체 8000억파운드 정도인 영국 정부 예산의 20% 가까이 된다. 예산 규모는 출범 첫해인 1948년 4억3700만파운드에서 70년 만에 343배로 불어났다. 그동안의 물가 상승을 감안하더라도 15배 늘었다. 그런데도 예산이 부족하다. NHS는 매년 적자를 내고 있다. 2016년 8억파운드, 지난해 10억파운드 적자를 냈다.

가장 큰 원인은 고령화다. NHS 설립 당시엔 영국 인구의 48%가 65세가 되기 전에 사망했다. 지금은 14%만이 65세 전에 사망한다. 그 사이 기대수명이 13년 늘었다. 지난해 기준 영국 인구의 18.1%가 65세 이상이다. 영국 전체 의료비의 40%가 65세 이상 국민에게 쓰인다.

고령화로 의료 수요가 증가하는 데 비해 의료 인력과 시설은 턱없이 부족하다. 영국 킹스펀드가 지난달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영국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2.8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3.6명보다 20% 넘게 적었다. 중환자실의 62%는 간호사가 부족해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고 있다.

인력 부족은 의료 서비스의 질 저하로 이어진다. 병실이 부족해 병원 복도, 심지어 주차장에서 치료받는 환자도 있다. 영국 정부는 구급차를 요청한 환자의 95% 이상을 4시간 안에 병원으로 옮겨 진료받게 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하지만 2015년 7월 이후 이 목표를 달성한 적이 없다.

영국 정부는 NHS 예산을 2023년까지 매년 200억파운드씩 늘리기로 했다. 문제는 재원 마련이다. 영국 싱크탱크인 재정연구소(IFS)와 건강재단은 NHS 적자를 메우려면 가구당 2000파운드의 세금을 더 내야 한다고 분석했다.

의료 서비스 일부를 유료로 전환하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여론조사회사 입소스가 지난 6월 영국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42%는 일부 의료 서비스에 환자가 돈을 내도록 하는 방안에 찬성했다.

◆산부인과 찾아 100㎞ 가야 하는 스웨덴

북유럽의 대표적인 복지국가 스웨덴도 고령화 문제로 무상의료정책이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지난해 스웨덴 인구의 19.8%가 65세 이상이었다. 초고령사회(노인 인구 20% 이상) 진입을 앞두고 있다. 스웨덴에서는 수술이나 전문적인 치료를 받기 위해 90일 이상 기다린 환자가 4만 명을 넘는다. 4년 만에 3배 늘었다. 진단을 받고도 1년 넘게 지나서야 수술받는 환자가 적지 않다.

입원 치료가 필요한데도 병실이 부족해 이 병원, 저 병원을 찾아다니는 환자도 많다. 스웨덴은 인구 대비 병상 수가 유럽에서 가장 적다. 채산성을 맞추지 못해 문을 닫는 병원이 늘어나면서 임신부들이 집에서 100㎞ 이상 떨어진 산부인과를 찾아가야 하는 지역도 있다. 스톡홀름의 일부 병원에선 의사와 간호사가 부족해 예약한 수술의 10% 정도가 취소된다. 마크 페리 미국기업연구소(AEI) 연구원은 “무상의료는 무료지만 정말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한다”고 비꼬았다.

공공의료 수준이 낮아지다 보니 개인 의료보험을 이용하는 국민이 늘고 있다. 개인 의료보험 가입자는 공공의료 제도와 별도로 운영되는 민간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다. 스웨덴의 개인 의료보험 가입자는 2000년 10만 명 수준에서 지난해 말 64만3000명으로 늘었다.

스웨덴 국민의 불만은 높아지고 있다. 세금 부담은 세계 최고 수준인데 복지 서비스 수준은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스웨덴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조세부담률은 40%가 넘는다. 스웨덴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CEO) 12명은 최근 한 언론에 낸 공동 기고문에서 “세금 부담은 큰데 정치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며 “세금을 낸 만큼의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