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인 이춘식 씨(앞줄 오른쪽 두 번째)가 신닛테쓰스미킨(옛 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한 직후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인 이춘식 씨(앞줄 오른쪽 두 번째)가 신닛테쓰스미킨(옛 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한 직후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대법원이 30일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하면서 계류 중인 10여 건의 유사 소송에서도 원고들이 승소할 가능성이 커졌다. 미쓰비시중공업 등 68개 일본 기업을 대상으로 한 강제징용 피해자의 소송이 제기돼 있어 파장이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이와 함께 이번 사건의 원고 4명 중 3명이 사망하는 등 재판 기간이 13년 넘게 이어진 것을 두고 고의로 재판을 지연했다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의 책임 규명 목소리도 더욱 커지게 됐다.

대법원, 일본 최고재판소 판결 정면 반박

1941~1943년 일본제철소에 강제 동원됐던 여운택·신천수·이춘식·김규수 씨 등 피해자 네 명은 2005년 우리 법원에 소장을 제출한 지 13년8개월 만에 결론을 받아냈다. 일본에서 소송을 진행하다가 2003년 패소를 확정받은 이들은 2005년 1월께 한·일 청구권 협정 관련 문서가 공개되면서 비로소 국내에서 소를 제기했다.

이날 선고에선 대법원이 일본 기업의 강제징용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일본 최고재판소 판결의 효력을 인정할 것인지에 관심이 쏠렸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사회질서에 어긋난다”며 일본 소송 결과를 뒤집었다.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배가 합법적이란 전제 아래서 내려진 판결은 우리 헌법 가치에 위배되므로 효력을 가질 수 없다는 논리다.

재판의 또 다른 핵심 쟁점은 1965년 체결한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원고들의 위자료 청구권이 박탈됐는지 여부였다. 일본 법원과 한국 법원 1·2심은 ‘양국 국민의 청구권 문제를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한다’는 협정 문구를 근거로 강제징용 피해자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봤으나 대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협정 당시 일본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 의무를 원천적으로 부인했다”며 “따라서 협정 대상에 강제징용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봤다.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기간인 소멸시효가 다 됐다거나, 일제강점기 일본제철의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 책임을 신닛테쓰스미킨(옛 일본제철)이 지지 않는다는 피고 측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따라 전국 각급 법원에서 심리 중인 13건의 강제징용 소송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현재 서울고등법원에 근로정신대 피해자 5명이 일본 전범 기업 후지코시를 상대로 낸 소송과 강제동원 피해자 14명의 유가족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소송의 항소심이 계류 중이다. 이 밖에 원고 667명이 68개 일본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 1심도 서울중앙지법에서 진행 중이다.
대법 "배상책임 부정한 日판결 국내 효력 없어"…13년 만에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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檢,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 영향 ‘주목’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도 이번 선고를 주목했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 설치 등을 거래로 청와대와 협의 아래 재판을 고의로 지연했다는 것이 검찰이 주장하는 ‘재판 거래’ 혐의의 핵심이다. 대법원이 이미 심리한 사건이기에 확인만 하면 판결이 확정되는 상황이었으나 선고가 5년 넘게 미뤄지며 고의로 재판을 지연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검찰 관계자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구속영장에는 강제징용 재판에 대해 청와대와 협의를 거친 내용이 27쪽에 걸쳐 상세히 기록돼 있다”며 “재판 개입에 대해 규정한 법은 없지만 재판권의 독립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침해했다는 점에서 명백히 불법”이라고 말했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원고 네 명 중 이씨를 제외한 세 명은 세상을 떴다. 올해 94세인 이씨는 이날 선고 공판에 참석해 “(원고가) 넷이었는데 나 혼자만 (선고 방청을) 하게 돼 서럽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씨는 17세이던 1941년 강제징용돼 옛 일본제철의 가마이시 제철소에서 3년간 중노동했으나 임금을 한 차례도 받지 못했다.

이번 판결이 배상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판결 직후 신닛테쓰스미킨 측은 “이번 판결은 한·일 청구권 협정과 일본 정부의 견해에 반한다”며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법원 관계자는 “피고 측이 배상을 거부하면 원고 측 신청에 의해 강제 집행이 이뤄지는데, 한국 내에 자산이 없을 경우 일본 법원의 승인을 거쳐야 일본 자산을 강제 집행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씨 측 변호인들은 이날 “신닛테쓰스미킨에 위자료 지급을 이행할 의사가 있는지 먼저 타진한 후 강제 집행 신청 여부를 논의하겠다”고 말했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