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박한 고전지식·유려한 문체…삼류통속 인식짙던 무협지를 대하문학 격상
80~90년대 우리나라 휩쓸던 홍콩 무협영화 원작 수두룩


94세를 일기로 타계한 무협 판타지의 거장 진융(金庸)은 14억 중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다.

우리나라에서는 만화방, 대서소 등에 깔린 무협지의 원작자로 인식되는 등 저평가돼 있지만, 중국에서는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 수준의 대접을 받는다.

특히 대중적 인기 면에서는 중국 내에서 따라갈 작가가 없다.

중국출판과학연구소 전국 조사에서 진융은 바진(巴金), 루쉰(魯迅), 충야오(瓊瑤) 등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무협 판타지 대가' 진융…중국에선 셰익스피어급
서사 구조가 중요한 소설 문학의 기본인 '재미'와 대중성에선 오래전부터 독보적인 위상을 확보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문학성과 문체까지도 중국 학계로부터 인정받았다.

해박한 고전 지식을 바탕으로 요즘 유행하는 융합과 통섭의 글쓰기를 일찌감치 보여줬다.

특히 소설 '천룡팔부(天龍八部)'는 2천년대 들어 중국 중고교 국어 교과서에까지 실렸다.

2007년엔 소설 '운산비호(雲山飛狐)'가 대문호 루쉰의 명저 '아큐정전(阿Q正傳)'을 밀어내고 베이징 내 고등학교 교과서 한편에 자리 잡았다.

교과서에 실리는 문학 작품은 문체와 작품성, 배경 사상 등이 교육적이고 모범적이면서 표준이라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진융의 소설이 교과서에 실린 것은 각계로부터 명실상부한 '국민 작가', '문장가'로 인정받는다는 방증이다.

홍승직 순천향대 중국학과 교수는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진융의 원문을 보면 문장이 매우 깔끔하고 모범적이어서 나무랄 데 없다"면서 "동서고금 해박한 역사 지식을 바탕으로 시의적절한 인용도 잘한다"고 말했다.

홍 교수는 또 "진융이 한국엔 통속 작가로 알려졌지만, 문장 자체는 '명문'이고 통속 소설의 위치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고 덧붙였다.

지금 정치권을 비롯한 사회 각계 중추 세력으로 자리 잡은 이른바 '86세대'는 진융 열풍을 이끌었던 주요 독자층이다.

86세대가 성장하던 시절 만화방에 가득 꽂힌 진융 무협지는 고단한 현실을 잊게 해주는 환상의 도피처였다.

'사조영웅전·신조협려·의천도룡기'로 구성된 대표작 '사조삼부곡'(국내에선 '영웅문'으로 번역 출간)를 비롯해 '녹정기', '소오강호', '동방불패' 등 제목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는 올드팬이 여전히 많다.

이들 작품은 80~90년대 선풍적 인기를 끈 홍콩 무협 영화로 상당수 제작돼 무협지를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중국 무협 판타지 특유의 이야기 구조와 철학을 알렸다.

이런 영향은 우리 영화와 드라마, 광고, 대중문학 등에도 깊게 파고들었다.

'말죽거리 잔혹사'를 연출한 유하 감독은 어린 시절 무협지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한 바 있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절정은 이소룡을 동경하는 주연 권상우가 쌍절권을 들고 악인(불량학생들)을 응징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국내 학계 등에서 진융의 작품은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엄숙주의'가 지배한 우리 문화 예술계에서 무협 소설은 삼류 싸구려 취급을 받았고, 이런 풍토는 출판계에도 이어져 정식 출간이나 번역을 꺼리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진융의 무협 소설은 대만에서만 1천만부, 중국에서 1억부 이상이 팔렸으며, 세계적으로 3억명의 독자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우리나라 출판업계에 제대로 된 통계가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출판계와 중국 문학 전문가들에 따르면 진융 무협지는 해적판이 많이 출간됐고 번역자들도 실명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1985년 고려원이 진융 작품을 정식 출간할 때 참여한 공동 번역자들도 가명을 썼다.

당시엔 무협지가 정통문학이 아니기 때문에 실명 쓰는 걸 부끄러워하고 꺼리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분위기가 많이 바뀐 2007년엔 김영사가 진융의 주요 작품들을 새롭게 번역해 출간하고 그를 국내에 초청해 기자간담회까지 열었다.

그러나 여전히 진융 무협 소설 전체 판매고를 집계한 공식 통계는 없고 지금까지 수백만 부 이상이 팔렸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서점업계 관계자는 "아직 진융의 작품이 시중에서 절판되지는 않았지만, 워낙 절필을 일찍 한 분이라 이제는 통계를 내는 것이 의미가 없을 만큼 거의 안 팔린다"고 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