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은행인 한국산업은행이 문재인 정부의 탈(脫)원자력발전 정책 추진에 따른 자회사 한국전력공사의 실적 악화에 대해 내부적으로 적지 않은 우려를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전 이익이 급감하면 이 회사 지분 32.9%를 보유한 산은의 재무지표도 악영향을 받는다. 산은은 자기자본비율 등 자본적정성이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규모 증자를 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했고, 국회의 예산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脫원전 불똥 튄 産銀, 5000억 예산 지원 'SOS'…野 "한 푼도 못줘"
산은 손실 메워준 한전

8일 정치권에 따르면 산은은 지난 7월 소관 부처인 금융위원회에 1조원 규모의 증자를 요청했다. 산은은 출자 요청 배경에 대해 “한국GM과 STX조선해양 등 부실기업 자금 지원 과정에서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그 여파로 재무지표가 나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선제적으로 자본을 확충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산은은 내년까지 한국GM에 7억5000만달러(약 8400억원)를 출자하고 STX조선해양에도 5671억원 상당의 선수금환급보증(RG)을 발급할 예정이다. 이 과정에서 5460억원의 손실이 발생해 은행의 자본적정성을 나타내는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자기자본/위험자산)이 작년 말보다 0.37%포인트 낮은 수준까지 떨어질 것이라는 게 산은의 주장이다. 지난 6월 말 기준으로 산은의 BIS 비율은 15.46%다. 금융위는 산은에 대한 출자 명목으로 1조원을 내년도 예산안에 편성했으나, 기획재정부의 예산 심사 과정에서 절반으로 감액됐다.

산은이 부실기업에 정책자금을 수혈하는 과정에서 손실을 떠안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산은은 2014년 대우조선해양과 한진해운, STX그룹 계열사에 5조6000억원의 구조조정 비용을 투입하면서 한 해 동안에만 3조6411억원의 순손실(한전 순이익 등을 제외한 별도재무제표 기준)을 봤다. 하지만 당시 산은 측은 “평상시에 축적한 이익으로 손실을 충분히 메울 수 있고, 자본적정성도 나빠지지 않을 것”이라며 정부 지원의 필요성을 일축했다.

당시 산은의 대규모 순손실에 따른 자본적정성 악화를 막아준 것은 호(好)실적을 내고 있는 자회사 한전이었다. 한전은 2014년 전년보다 44배 늘어난 2조6869억원의 순이익을 거둔 데 이어 2015년엔 사상 최대인 13조4164억원의 순이익을 냈다.

한전은 순이익 증가로 자기자본을 구성하는 이익잉여금이 늘어났고, 이는 모회사 산은의 자기자본 증가로 이어졌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김선동 자유한국당 의원이 한전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산은의 BIS 비율은 2015년 이후 3년간 한전 이익이 대거 유입된 덕분에 2.14%포인트 상승했다.

한국당 “한 푼도 못 준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한전에 자금줄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산은 안팎의 판단이다. 산은 관계자는 “올 상반기 1조원대 적자를 낸 한전이 오히려 BIS 비율 유지에 부담을 주는 요인이 됐다”고 말했다. 정부의 탈원전 기조에 따라 기름·가스 등을 연료로 사용하는 발전 단가가 오르면서 한전은 올 상반기 1조1691억원의 순손실을 봤다. 그중 지분법에 따라 산은 손실로 잡히는 금액은 3846억원이다. 산은의 작년 한 해 순이익(5634억원)의 70%에 육박하는 액수다. 김 의원은 한전 손실이 전이되면서 산은의 BIS 비율도 약 0.13%포인트 떨어질 것으로 추정했다. 이번 증자 요청이 한전의 실적 악화에서 비롯됐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한국당은 이달 금융위 예산 심사 과정에서 산은에 대한 출자금 전액을 삭감하겠다는 입장이다. 증자 근거가 잘못됐다는 이유에서다. 김 의원은 “산은이 탈원전 정책 탓에 한전 이익이 급감하면서 BIS 비율에도 빨간불이 들어왔다는 말은 쏙 빼고 전 정부 탓에 실탄이 필요해졌다고 강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동걸 산은 회장은 지난달 정무위 국정감사에 출석해 “산은이 갖고 있는 부실기업은 모두 전 정부가 4~5년 전 무턱대고 떠맡긴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 정부의 구조조정 실패 탓에 산은의 재무상태가 나빠졌다는 얘기다. 지난 7월에는 ‘1조원 증자’를 요청하면서 “산은이 과거 구조조정을 하면서 엄청난 손실이 났지만, 정부는 단돈 1원도 지원해주지 않았다”고 했다.

김 의원은 “이 같은 산은 내부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증자에는 동의할 수 없다”며 “BIS 비율 하락 위험 요인을 다시 짚어 자본 확충을 요청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헌형 기자 hh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