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유럽, 전쟁이 끝났을 뿐 폭력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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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나지 않았는가
로버트 거워스 지음 / 최파일 옮김
김영사 / 508쪽│2만2000원
로버트 거워스 지음 / 최파일 옮김
김영사 / 508쪽│2만2000원
1918년 11월11일 아침 프랑스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70㎞쯤 떨어진 콩피에뉴의 아름다운 숲. 중앙당 의원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가 이끄는 독일 대표단이 숲속 열차 안에서 연합국과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협정은 서명 후 6시간 뒤 발효됐고, 마침내 서부전선의 포성이 멎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제국은 독일보다 앞서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1914년 7월28일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선전포고로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은 이렇게 끝이 났다. 1000만 명 가까운 전사자와 2000만 명의 부상자를 낳은 사상 최악의 대전(大戰)이 끝나고 드디어 평화의 시대가 온 것일까.
《왜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나지 않았는가》는 이런 물음에 부정적인 대답을 제시한다. 서부전선의 포성이 그친 뒤에도 대전 후유증이 유럽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1920년대 전반까지 지속됐다는 것이다. 저자 로버트 거워스는 방대한 사료를 철저하게 조사하는 것으로 유명한 젊은 역사학자다. 아일랜드 국립 더블린유니버시티칼리지의 현대사 교수이자 전쟁연구센터 소장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 이야기가 아니라 진 쪽의 나라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합스부르크, 로마노프, 호엔촐레른, 오스만제국과 그 후계 국가들, 불가리아 등이다. 전쟁이 끝나자 평화를 맞이한 승전국과 달리 1918년 1차 대전의 공식적인 종식과 1923년 로잔조약 사이의 ‘전후’ 유럽은 지구상에서 가장 폭력적인 공간이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상호 연결된 일련의 전쟁과 내전이 혁명과 반혁명, 분명하게 확정된 국경과 국제적으로 인정된 정부가 없는 상태에서 생성 중인 국가 간 분쟁과 중첩되면서 엄청난 폭력과 야만적인 행위가 자행됐다는 것이다.
에게해에 면한 터키의 세 번째 도시 이즈미르의 옛 이름은 스미르나였다. 1919년 승전국의 일원인 그리스의 침공군이 스미르나에 상륙했다. 기독교도가 부분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소아시아에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3년에 걸친 양측의 무력충돌 결과 전세는 그리스에 결정적으로 불리해졌다. 무스타파 케말(아타튀르크)이 이끄는 터키군의 반격으로 궤멸된 그리스군은 퇴각하면서 무슬림 주민을 상대로 약탈, 살인, 방화를 자행했다. 터키군은 동방정교회의 크리소스토모 대주교를 끔찍하게 처형하고 기독교도 거주 구역에 불을 질렀다. 당시 토론토스타지의 해외통신원이던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항구에 정박한 연합군 배로 건너가려는 기독교인들의 아비규환을 단편 ‘스미르나 부둣가에서’에 담아냈다.
저자는 “1919년 리가, 키예프, 스미르나, 동유럽, 중유럽, 남동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아니라 오로지 끝없는 폭력만이 있었을 뿐”이라고 강조한다. 전후 유럽의 무력 갈등으로 죽은 사람이 400만 명을 훨씬 넘는다고 한다. 1차 대전 당시 영국, 프랑스, 미국의 전사자를 합친 것보다 많은 숫자다. 더욱이 중부, 동부, 남부 유럽에서 온 수백만 명의 가난한 난민들은 더 나은 삶을 찾아 서유럽 곳곳을 헤매야 했다.
패전 지역뿐만 아니었다. 그리스·터키 전쟁은 대전의 승전국이던 그리스에게 스미르나의 대참사를 안겨줬다. 1차 대전으로 60만 명의 사상자를 낸 이탈리아는 전후 보상이 적다고 여겼고, 1922년 10월 최초의 파시스트 총리 무솔리니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로잔 조약이 체결된 1923년 이후 누리던 짧은 안정기는 1929년의 대공황과 함께 유럽 전역을 또 한 번 위기와 폭력적 무질서에 빠뜨렸다. 경제적·정치적 위기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고, 서구 자본주의의 병폐를 일소하고 패전국에 씌워진 멍에를 벗고 신질서를 모색하려는 움직임을 가속화했다. 1929년과 1932년 히틀러의 선거 승리는 그런 결과였다. 2차 세계대전의 씨앗을 1차 대전이 뿌렸던 것이다.
저자는 한때 오스만제국이 지배하던 아랍지역을 괴롭히는 갈등을 예로 들며 1차 대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종전 100주년이 된 지금도 시리아, 이라크의 내전, 이집트 혁명, 팔레스타인 문제를 둘러싼 유대인과 아랍인 간 충돌이 뒤따르는 건 섬뜩한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고 지적한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왜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나지 않았는가》는 이런 물음에 부정적인 대답을 제시한다. 서부전선의 포성이 그친 뒤에도 대전 후유증이 유럽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1920년대 전반까지 지속됐다는 것이다. 저자 로버트 거워스는 방대한 사료를 철저하게 조사하는 것으로 유명한 젊은 역사학자다. 아일랜드 국립 더블린유니버시티칼리지의 현대사 교수이자 전쟁연구센터 소장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 이야기가 아니라 진 쪽의 나라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합스부르크, 로마노프, 호엔촐레른, 오스만제국과 그 후계 국가들, 불가리아 등이다. 전쟁이 끝나자 평화를 맞이한 승전국과 달리 1918년 1차 대전의 공식적인 종식과 1923년 로잔조약 사이의 ‘전후’ 유럽은 지구상에서 가장 폭력적인 공간이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상호 연결된 일련의 전쟁과 내전이 혁명과 반혁명, 분명하게 확정된 국경과 국제적으로 인정된 정부가 없는 상태에서 생성 중인 국가 간 분쟁과 중첩되면서 엄청난 폭력과 야만적인 행위가 자행됐다는 것이다.
에게해에 면한 터키의 세 번째 도시 이즈미르의 옛 이름은 스미르나였다. 1919년 승전국의 일원인 그리스의 침공군이 스미르나에 상륙했다. 기독교도가 부분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소아시아에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3년에 걸친 양측의 무력충돌 결과 전세는 그리스에 결정적으로 불리해졌다. 무스타파 케말(아타튀르크)이 이끄는 터키군의 반격으로 궤멸된 그리스군은 퇴각하면서 무슬림 주민을 상대로 약탈, 살인, 방화를 자행했다. 터키군은 동방정교회의 크리소스토모 대주교를 끔찍하게 처형하고 기독교도 거주 구역에 불을 질렀다. 당시 토론토스타지의 해외통신원이던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항구에 정박한 연합군 배로 건너가려는 기독교인들의 아비규환을 단편 ‘스미르나 부둣가에서’에 담아냈다.
저자는 “1919년 리가, 키예프, 스미르나, 동유럽, 중유럽, 남동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아니라 오로지 끝없는 폭력만이 있었을 뿐”이라고 강조한다. 전후 유럽의 무력 갈등으로 죽은 사람이 400만 명을 훨씬 넘는다고 한다. 1차 대전 당시 영국, 프랑스, 미국의 전사자를 합친 것보다 많은 숫자다. 더욱이 중부, 동부, 남부 유럽에서 온 수백만 명의 가난한 난민들은 더 나은 삶을 찾아 서유럽 곳곳을 헤매야 했다.
패전 지역뿐만 아니었다. 그리스·터키 전쟁은 대전의 승전국이던 그리스에게 스미르나의 대참사를 안겨줬다. 1차 대전으로 60만 명의 사상자를 낸 이탈리아는 전후 보상이 적다고 여겼고, 1922년 10월 최초의 파시스트 총리 무솔리니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로잔 조약이 체결된 1923년 이후 누리던 짧은 안정기는 1929년의 대공황과 함께 유럽 전역을 또 한 번 위기와 폭력적 무질서에 빠뜨렸다. 경제적·정치적 위기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고, 서구 자본주의의 병폐를 일소하고 패전국에 씌워진 멍에를 벗고 신질서를 모색하려는 움직임을 가속화했다. 1929년과 1932년 히틀러의 선거 승리는 그런 결과였다. 2차 세계대전의 씨앗을 1차 대전이 뿌렸던 것이다.
저자는 한때 오스만제국이 지배하던 아랍지역을 괴롭히는 갈등을 예로 들며 1차 대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종전 100주년이 된 지금도 시리아, 이라크의 내전, 이집트 혁명, 팔레스타인 문제를 둘러싼 유대인과 아랍인 간 충돌이 뒤따르는 건 섬뜩한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고 지적한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