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 를 향한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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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 커지는 협력이익공유제
합리적, 협력적 등 어떤 이름 붙여도
이윤은 공유 대상 될 수 없어
大·中企는 비전 공유로 신뢰 쌓아야
국민경제는 정책 실험 대상 아냐
前代未踏 환상에서 벗어나야"
조동근 < 명지대 명예교수·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
합리적, 협력적 등 어떤 이름 붙여도
이윤은 공유 대상 될 수 없어
大·中企는 비전 공유로 신뢰 쌓아야
국민경제는 정책 실험 대상 아냐
前代未踏 환상에서 벗어나야"
조동근 < 명지대 명예교수·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
문재인 대통령 취임사를 다시 열어본다. “지금 제 가슴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뜨겁다. 그리고 지금 제 머리는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청사진으로 가득 차 있다.”
일찍이 앨프리드 마셜은 경제학자의 소양으로 ‘냉철한 두뇌와 따듯한 가슴’을 꼽았다. 그는 냉철한 머리에 방점을 찍었다. 다만 ‘따듯한 가슴’을 잊지 않을 것을 주문했다. 문 대통령은 정치인이기에 가슴을 앞세운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대목에선 숨이 멎는다.
대기업의 이익 일부를 중소기업에 나눠주는 ‘협력이익공유제’ 법제화를 둘러싼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사적 이익을 나누라는 것은 자본주의 시장 원리를 부정하는 제도라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하지만 정부의 입장은 단호하다. 급작스러운 게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해 7월 발표된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에 협력이익배분제가 포함됐고, 올초 중소벤처기업부 업무보고에서 협력이익배분제 법제화를 예고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중소기업 양극화를 시정하는 노력을 지금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상황이 급박하다고 설명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매출액영업이익률 격차는 2015년 1.1%포인트에서 2016년에는 2.1%포인트로 확대됐으며 중소기업의 임금이 대기업의 절반 수준이라는 것이 협력이익배분제 도입 주장의 논거다.
이해가 충돌할수록 멀리서 봐야 한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1516)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유토피아는 직물업의 발전으로 양모 수요가 늘자 지주들이 양치기를 위해 농민들을 내쫓는 ‘인클로저(enclosure)’ 운동을 사회적 배경으로, ‘히슬로 다에우스’와 ‘모어’라는 가상 인물의 논쟁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히슬로가 주장한다. “재산이 소수의 사람에게 한정돼 있는 한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현실의 비참한 상황이 전개된 원인이 인간의 탐욕일 것인데, 탐욕을 낳은 근본적인 원인인 사유재산제와 화폐제도를 폐기하고 노동을 사회적 책무로 부과하면 무위도식도 없어지고 질투도 없어져 모두 덕을 숭상하면서 모든 사람이 풍요롭게 살 수 있다.” 모어는 정면으로 반박한다. “모든 것을 공유하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잘살 수 없다. 모든 사람이 일을 안 하려고 할 텐데 어떻게 물자가 풍부할 수 있겠는가. 이익을 얻을 희망이 없으면 자극을 받지 못한다. 결국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려 하고 게을러질 것이다. 열심히 일해 얻은 것을 합법적으로 보장받지 못하면 사람들은 일손을 놓을 것이다.”
한국적 현실에서 대기업의 ‘인클로저’로 중소기업이 질식했는가. 중소기업의 낮은 경제 성과가 대기업의 횡포와 전횡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다면 이익공유제는 해법이 될 수 없다.
글로벌 경쟁시대에는 설계·제조의 ‘복합 경쟁력’을 가진 기업이 살아남는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클러스터 경쟁력’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기업과 협력기업 간 소통 강화가 관건이다. 비전 공유를 통한 신뢰 구축이 그 길이며 이는 기업 간 ‘사적 자치’ 영역이다.
성과 공유와 이익 공유는 다른 개념이다. 합리적, 협력적 등 어떤 이름을 갖다 붙이더라도 매출과 이윤은 공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성과 공유는 기업 간에 플랫폼을 까는 것이기 때문에 정부 개입 없이도 각양각색의 자발적 협력이 가능하다. 모기업과 협력기업 간 기술 내재화를 통한 공정 개선, 기술 개발을 위한 인력 교류 및 시설 대여, 원자재 공동구매 등 다양한 성과 공유의 길이 열려 있다. 대기업이 모든 것을 다할 이유는 없다. 여러 사람의 지식과 아이디어를 결합할 때 비로소 기술개발이 이뤄진다. 기술거래를 위한 인수합병(M&A)이 활성화될 때 대·중소기업이 동반성장할 수 있다.
경제적 평등 전략은 국가가 박애주의 실천자가 돼서 특정 계층의 복지를 위해 기업, 납세자, 시민을 수단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이익공유제도 결국 같은 맥락이다. 국가정책은 기업 전략과 차원이 다르다. 국민경제가 정책 실험 대상일 수는 없다. ‘전대미답(前代未踏)’의 환상에 젖을 때가 아니다. 유토피아는 신기루(nowhere)를 의미한다.
일찍이 앨프리드 마셜은 경제학자의 소양으로 ‘냉철한 두뇌와 따듯한 가슴’을 꼽았다. 그는 냉철한 머리에 방점을 찍었다. 다만 ‘따듯한 가슴’을 잊지 않을 것을 주문했다. 문 대통령은 정치인이기에 가슴을 앞세운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대목에선 숨이 멎는다.
대기업의 이익 일부를 중소기업에 나눠주는 ‘협력이익공유제’ 법제화를 둘러싼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사적 이익을 나누라는 것은 자본주의 시장 원리를 부정하는 제도라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하지만 정부의 입장은 단호하다. 급작스러운 게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해 7월 발표된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에 협력이익배분제가 포함됐고, 올초 중소벤처기업부 업무보고에서 협력이익배분제 법제화를 예고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중소기업 양극화를 시정하는 노력을 지금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상황이 급박하다고 설명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매출액영업이익률 격차는 2015년 1.1%포인트에서 2016년에는 2.1%포인트로 확대됐으며 중소기업의 임금이 대기업의 절반 수준이라는 것이 협력이익배분제 도입 주장의 논거다.
이해가 충돌할수록 멀리서 봐야 한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1516)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유토피아는 직물업의 발전으로 양모 수요가 늘자 지주들이 양치기를 위해 농민들을 내쫓는 ‘인클로저(enclosure)’ 운동을 사회적 배경으로, ‘히슬로 다에우스’와 ‘모어’라는 가상 인물의 논쟁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히슬로가 주장한다. “재산이 소수의 사람에게 한정돼 있는 한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현실의 비참한 상황이 전개된 원인이 인간의 탐욕일 것인데, 탐욕을 낳은 근본적인 원인인 사유재산제와 화폐제도를 폐기하고 노동을 사회적 책무로 부과하면 무위도식도 없어지고 질투도 없어져 모두 덕을 숭상하면서 모든 사람이 풍요롭게 살 수 있다.” 모어는 정면으로 반박한다. “모든 것을 공유하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잘살 수 없다. 모든 사람이 일을 안 하려고 할 텐데 어떻게 물자가 풍부할 수 있겠는가. 이익을 얻을 희망이 없으면 자극을 받지 못한다. 결국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려 하고 게을러질 것이다. 열심히 일해 얻은 것을 합법적으로 보장받지 못하면 사람들은 일손을 놓을 것이다.”
한국적 현실에서 대기업의 ‘인클로저’로 중소기업이 질식했는가. 중소기업의 낮은 경제 성과가 대기업의 횡포와 전횡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다면 이익공유제는 해법이 될 수 없다.
글로벌 경쟁시대에는 설계·제조의 ‘복합 경쟁력’을 가진 기업이 살아남는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클러스터 경쟁력’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기업과 협력기업 간 소통 강화가 관건이다. 비전 공유를 통한 신뢰 구축이 그 길이며 이는 기업 간 ‘사적 자치’ 영역이다.
성과 공유와 이익 공유는 다른 개념이다. 합리적, 협력적 등 어떤 이름을 갖다 붙이더라도 매출과 이윤은 공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성과 공유는 기업 간에 플랫폼을 까는 것이기 때문에 정부 개입 없이도 각양각색의 자발적 협력이 가능하다. 모기업과 협력기업 간 기술 내재화를 통한 공정 개선, 기술 개발을 위한 인력 교류 및 시설 대여, 원자재 공동구매 등 다양한 성과 공유의 길이 열려 있다. 대기업이 모든 것을 다할 이유는 없다. 여러 사람의 지식과 아이디어를 결합할 때 비로소 기술개발이 이뤄진다. 기술거래를 위한 인수합병(M&A)이 활성화될 때 대·중소기업이 동반성장할 수 있다.
경제적 평등 전략은 국가가 박애주의 실천자가 돼서 특정 계층의 복지를 위해 기업, 납세자, 시민을 수단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이익공유제도 결국 같은 맥락이다. 국가정책은 기업 전략과 차원이 다르다. 국민경제가 정책 실험 대상일 수는 없다. ‘전대미답(前代未踏)’의 환상에 젖을 때가 아니다. 유토피아는 신기루(nowhere)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