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선이가 신던 '타이거 운동화'는 어디로 갔나…'응답없는' 신발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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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산업 100년, 기로에 서다
(1) '점프' 못하는 신발 메카 부산
그때 1020 워너비 아이템 '타이거'
고무신 만들던 삼화고무의 운동화
직원 1만명·수출 1,2위 다퉜지만
1980년대 후반 나이키 등 유입
1992년 폐업…신발산업 쇠퇴 길
세계 신발 수출 2위, 어쩌다…
대형 제조사, 인건비 싼 동남아行
세계시장 진출 안하고 내수 만족
신발로 돈벌어 건설 진출 등 '위기'
"88올림픽 활용 못한게 뼈 아파"
(1) '점프' 못하는 신발 메카 부산
그때 1020 워너비 아이템 '타이거'
고무신 만들던 삼화고무의 운동화
직원 1만명·수출 1,2위 다퉜지만
1980년대 후반 나이키 등 유입
1992년 폐업…신발산업 쇠퇴 길
세계 신발 수출 2위, 어쩌다…
대형 제조사, 인건비 싼 동남아行
세계시장 진출 안하고 내수 만족
신발로 돈벌어 건설 진출 등 '위기'
"88올림픽 활용 못한게 뼈 아파"
신발업계에서는 대륙고무공업사가 서울 원효로에 공장을 세운 1919년을 국내 신발산업의 태동으로 보고 있다. 고무신으로 시작된 신발산업은 1970~1980년대 주요 수출품으로 각광받았다. 부산은 6·25전쟁 이후 신발업체들이 대거 몰려 ‘신발산업의 메카’로 떠올랐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국내 브랜드가 글로벌 브랜드에 밀리며 사양산업으로 내몰렸다. 신발산업 100년이 되는 올해 신발 제조업의 부활 가능성을 살펴본다.
영화 ‘1987’에서 이한열(강동원 분)과 연희(김태리 분)가 최루탄을 피해 들어간 곳은 서울 명동의 한 신발가게였다. 영화 속에서 각자 한 번씩 신발을 잃어버리는 두 사람은 서로에게 ‘타이거 운동화’를 선물한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도 주인공 덕선(혜리 분)이 엄마에게 타이거 운동화를 선물받고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하는 장면이 나온다.
타이거는 고무신(범표)을 주로 생산하던 삼화고무가 1976년 등록한 운동화 상표다. 직원 수 1만 명에 수출 실적 1, 2위를 다투던 삼화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나이키와 아디다스 같은 해외 브랜드가 국내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게다가 인건비가 상승하면서 삼화의 실적은 급격히 나빠졌다. 1992년 삼화의 폐업은 한국 신발의 전성기가 끝나감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고무신으로 시작한 신발산업 100년
한국 신발산업의 역사는 1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1919년 서울 원효로에 설립된 대륙고무공업사가 국내 최초의
대적 신발공장이다. 한·일 합작으로 세워진 이 공장에서 고무신이 처음 생산됐다. 이후 1920년대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고무신을 만드는 공장이 속속 들어섰다. 1933년 국내 신발업체 수가 73개에 달했다. 6·25전쟁 직후인 1958년에는 삼화고무, 태화고무, 국제상사, 동양고무 등 10개 대형업체가 신발산업을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신발산업의 1차 성장기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다. 1962년 동양선화가 미국에 고무신을 최초로 수출한 이후 신발산업은 주력 수출 품목으로 떠올랐다. 1971년 신발 수출 5000만달러, 1975년 1억달러를 돌파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국제상사는 1972년 세계 최대 규모의 신발 공장을 부산 사상에 지었다.
1980년대 국산 브랜드 전성시대
프로스펙스(1981년), 르까프(1986년) 등 국산 브랜드가 쏟아진 1980년대가 신발산업 2차 성장기다. 국제상사가 생산하던 ‘왕자표’ 고무신은 프로스펙스 운동화가 됐고, 동양고무의 ‘기차표’ 고무신은 르까프 운동화로 변신했다. 프로스펙스와 르까프는 지금도 남아 각각 LS네트웍스와 화승에서 브랜드를 유지하고 있다.
이 시기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도 크게 늘었다. 안광우 부산경제진흥원 신발산업진흥센터장은 “국내 신발 제조사들이 1970년대 컨베이어 시스템에 의한 대량생산 체제를 구축하면서 수출량이 대폭 늘었다”고 말했다. 1986년 471개였던 부산지역 신발산업 업체 수도 1990년 1123개로 늘었다.
1988년 신발 수출액은 38억달러에 달했다. 세계 신발 수출국 2위였다. 국내 브랜드 전성시대는 199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1994년 국내 운동화 시장 점유율은 프로스펙스와 르까프가 각각 1, 2위였고 글로벌 브랜드 나이키는 3위였다.
‘88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내리막길
국내 신발산업의 위기는 1980년대 중후반부터 조짐이 있었다. 1986년 아디다스와 리복이 한국 시장에 진출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전후로 인건비가 오르면서 저임금에 기반한 수출 산업에 빨간불이 켜졌다. 부산에 있던 대형 신발제조사들은 인건비가 싼 인도네시아, 중국, 베트남 등으로 공장을 옮기기 시작했다. 안 센터장은 “국내 브랜드가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기보다는 내수에만 만족했다”며 “신발로 돈을 번 대기업이 건설업 등 다른 사업에 눈을 돌리는 동안 위기가 빠르게 찾아왔다”고 지적했다.
국내 브랜드를 세계에 알릴 수 있었던 1988년 서울올림픽을 활용하지 못한 점도 뼈아픈 대목이다. 아디다스와 나이키는 각각 1972년 뮌헨올림픽과 1984년 LA올림픽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글로벌 브랜드로 올라섰다. 문창섭 한국신발산업협회장은 “글로벌 브랜드를 키워내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지원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기만 기자 mgk@hankyung.com
영화 ‘1987’에서 이한열(강동원 분)과 연희(김태리 분)가 최루탄을 피해 들어간 곳은 서울 명동의 한 신발가게였다. 영화 속에서 각자 한 번씩 신발을 잃어버리는 두 사람은 서로에게 ‘타이거 운동화’를 선물한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도 주인공 덕선(혜리 분)이 엄마에게 타이거 운동화를 선물받고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하는 장면이 나온다.
타이거는 고무신(범표)을 주로 생산하던 삼화고무가 1976년 등록한 운동화 상표다. 직원 수 1만 명에 수출 실적 1, 2위를 다투던 삼화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나이키와 아디다스 같은 해외 브랜드가 국내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게다가 인건비가 상승하면서 삼화의 실적은 급격히 나빠졌다. 1992년 삼화의 폐업은 한국 신발의 전성기가 끝나감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고무신으로 시작한 신발산업 100년
한국 신발산업의 역사는 1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1919년 서울 원효로에 설립된 대륙고무공업사가 국내 최초의
대적 신발공장이다. 한·일 합작으로 세워진 이 공장에서 고무신이 처음 생산됐다. 이후 1920년대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고무신을 만드는 공장이 속속 들어섰다. 1933년 국내 신발업체 수가 73개에 달했다. 6·25전쟁 직후인 1958년에는 삼화고무, 태화고무, 국제상사, 동양고무 등 10개 대형업체가 신발산업을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신발산업의 1차 성장기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다. 1962년 동양선화가 미국에 고무신을 최초로 수출한 이후 신발산업은 주력 수출 품목으로 떠올랐다. 1971년 신발 수출 5000만달러, 1975년 1억달러를 돌파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국제상사는 1972년 세계 최대 규모의 신발 공장을 부산 사상에 지었다.
1980년대 국산 브랜드 전성시대
프로스펙스(1981년), 르까프(1986년) 등 국산 브랜드가 쏟아진 1980년대가 신발산업 2차 성장기다. 국제상사가 생산하던 ‘왕자표’ 고무신은 프로스펙스 운동화가 됐고, 동양고무의 ‘기차표’ 고무신은 르까프 운동화로 변신했다. 프로스펙스와 르까프는 지금도 남아 각각 LS네트웍스와 화승에서 브랜드를 유지하고 있다.
이 시기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도 크게 늘었다. 안광우 부산경제진흥원 신발산업진흥센터장은 “국내 신발 제조사들이 1970년대 컨베이어 시스템에 의한 대량생산 체제를 구축하면서 수출량이 대폭 늘었다”고 말했다. 1986년 471개였던 부산지역 신발산업 업체 수도 1990년 1123개로 늘었다.
1988년 신발 수출액은 38억달러에 달했다. 세계 신발 수출국 2위였다. 국내 브랜드 전성시대는 199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1994년 국내 운동화 시장 점유율은 프로스펙스와 르까프가 각각 1, 2위였고 글로벌 브랜드 나이키는 3위였다.
‘88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내리막길
국내 신발산업의 위기는 1980년대 중후반부터 조짐이 있었다. 1986년 아디다스와 리복이 한국 시장에 진출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전후로 인건비가 오르면서 저임금에 기반한 수출 산업에 빨간불이 켜졌다. 부산에 있던 대형 신발제조사들은 인건비가 싼 인도네시아, 중국, 베트남 등으로 공장을 옮기기 시작했다. 안 센터장은 “국내 브랜드가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기보다는 내수에만 만족했다”며 “신발로 돈을 번 대기업이 건설업 등 다른 사업에 눈을 돌리는 동안 위기가 빠르게 찾아왔다”고 지적했다.
국내 브랜드를 세계에 알릴 수 있었던 1988년 서울올림픽을 활용하지 못한 점도 뼈아픈 대목이다. 아디다스와 나이키는 각각 1972년 뮌헨올림픽과 1984년 LA올림픽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글로벌 브랜드로 올라섰다. 문창섭 한국신발산업협회장은 “글로벌 브랜드를 키워내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지원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기만 기자 mg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