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헌병과 MP
소설가 이병주는 40대 중반에 늦깎이로 전업 작가가 됐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분단기를 거친 그는 체험을 바탕으로 식민시대, 분단, 좌우갈등을 다룬 작품을 많이 썼다. 그의 회고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하루 중 깨어 있는 동안 내 뺨은 내 것이 아니었다.” 와세다대 유학 때 끌려간 학병시절은 고달픈 일상의 연속이었다. 전시 제국의 군대에서 ‘고참’의 손은 말보다 더 빨랐다. 학도병 뺨은 무사한 날이 없었다. 헌병(憲兵)은 더욱 거칠었다.

대한민국이 독립하면서 국군이 창설됐지만 군국주의 시대 일본군의 잔재를 이식한 게 많았다. 제식훈련과 계급편제, 전술 등은 미군 체제를 많이 원용했지만 구타와 욕설로 요약되는 ‘군기잡기’는 대표적인 일제 잔재였다. ‘헌병’과 ‘헌병대’라는 용어도 일본군대의 흔적이다.

일본의 개화기 때 일본식으로 옮겨진 유럽과 미국 문물이 적지 않다. 단순 번역을 넘어 재작명에 가까운 것도 많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democracy’를 ‘민주주의’로, ‘society’를 ‘사회’로 소개한 것도 이 시기였다. 철학 예술 과학 기술 헌법 등 많은 용어가 그때 만들어졌다. 물론 지금 우리도 대부분 그대로 쓰는 말이다. 헌병은 이 시기 프랑스 군대의 ‘장다메리’(gendarmerie, 경찰서·헌병대)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프랑스군에서 ‘경찰 임무를 수행하는 조직’ 장다메리 편제를 눈여겨 본 일본이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헌병’이라는 말이 탄생했다. 규율을 바로 잡는다는 의미에서 ‘법 헌(憲)’자가 붙었다.

이 유래대로라면 헌병은 미군의 MP(military police)를 번역한 것이 아니다. 용어의 기원이 그럴 뿐, 군대 내 경찰이라는 점에서는 미군 MP와 다를 바 없다. 우리 군이 내년부터 헌병을 ‘군사경찰’로 바꾼다니, 용어상으로는 MP와 더 가까워진다. 군 편제에 익숙하지 않은 여성 번역가가 MP를 ‘군정경찰’로 번역했다는 ‘오역의 추억’이 이제는 없어질까.

미군은 부대나 계급에 따라 영외 생활이 다양해 MP 업무가 많은 편이다. 제대후 경찰 채용에 가산점을 노리는 헌병 지원자도 많다고 한다. 할리우드 영화의 중요한 소재가 미군인 데다 기지촌 등을 통해 MP는 반쯤 한국화된 영어이기도 하다.

‘정훈(政訓)’이라는 병과 명칭도 ‘공보정훈(公報精訓)’으로 바뀐다. 그런데 “이념무장을 강조하던 시대 정치훈련(政治訓練)의 약어여서 바꾼다”는 국방부 설명이 떨떠름하다. 우리 군에서 진행되고 있는 ‘소프트웨어 변화’가 과연 군 본연의 전투력 향상에 도움되는 것이냐는 질문도 새겨볼 필요가 있다. 항간에는 “국군이 전투 빼고는 다 잘하려는 것 같다”는 조롱과 탄식도 없지 않다. 1년에 47조원(2019년)이나 쓰며 과연 강군으로 가고 있는 건지 의구심이 든다는 얘기일 것이다. 강병(强兵)이 안 되면 부국(富國)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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