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여자오픈에서 우승을 확정할 수 있는 4피트(약 1.2m) 퍼트를 남겨 놓는다면, 직접 칠 건가요?’

에리야 쭈타누깐은 언니 모리야 쭈타누깐(이상 태국)과 함께 수년 전 한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이 같은 질문을 받았다. 언니 모리야가 “에리야에게 맡기겠어요. 만약에 그 퍼트를 놓치기라도 한다면 제 마음이 찢어질 것 같거든요”라며 고개를 저었다. 이를 듣던 에리야는 이렇게 말했다. “넣든 넣지 못하든 제가 직접 할 거예요.”

쭈타누깐(이하 에리야 쭈타누깐)의 승부욕을 보여주는 일화는 또 있다. 그는 2012년 프로로 전향한 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 데뷔하려 했다. LPGA투어가 만 18세 나이 제한에 걸리는 쭈타누깐의 퀄리파잉 스쿨 응시를 거절하자 “(그들의 선택에) 매우 실망이다. 하지만 내게 동기를 부여해줬다. 내가 얼마나 훌륭한 골퍼인지 그들에게 보여줄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듬해 쭈타누깐은 유럽여자프로골프투어(LET)에서 첫 프로 무대 우승(라라 메리엄 컵)을 거두며 보란 듯 활약했고 2015년 LPGA투어에 입성했다.

멘탈 트레이닝서 해답 찾아

자신감과 승부욕은 쭈타누깐을 이끌어 온 원동력이자 동시에 약점으로 작용했다. 그는 2013년 자신의 안방인 태국에서 열린 LPGA투어 혼다LPGA 타일랜드 최종라운드에서 17번홀까지 선두를 달려 우승을 눈앞에 뒀다가 18번홀에서 트리플 보기를 범해 박인비(30)에게 우승컵을 내줬다. 지독한 슬럼프에 빠진 그는 2016년 메이저대회 ANA 인스퍼레이션에서도 15번홀까지 2타 앞서다 16번홀부터 3개 홀 연속 보기로 미끄러졌다. 300야드에 육박한 남자 못지않은 장타와 피지컬도 ‘새가슴’ 멘탈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렇게 무대 뒤로 퇴장할 것 같던 쭈타누깐은 2016년 멘탈 코치를 만난 후 다시 태어났다. 코치로부터 미소를 지어보라는 권유를 받고 이를 시행하면서 심리적 안정을 얻었다. 그해 5월 요코하마 타이어 클래식 우승으로 LPGA투어 첫 승을 거두더니 같은 달 열린 킹스밀 챔피언십과 볼빅 챔피언십마저 제패하며 완성형 선수로 거듭났다. 그해 7월 브리티시 여자오픈에서 첫 메이저 우승까지 차지한 그는 당시 “이제 내가 긴장하거나 떨릴 때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미생에서 완생으로…쭈타누깐 시대

한때 언니 품에 안겨 흐느껴 울던 쭈타누깐은 이제 LPGA투어 최고의 선수가 됐다. 쭈타누깐은 19일 미국 플로리다주 네이플스의 티뷰론GC(파72)에서 열린 시즌 최종전 CME그룹 투어 챔피언십(총상금 250만달러) 최종라운드에서 12언더파 276타를 적어내 공동 5위를 기록했다.

렉시 톰슨(미국)이 최종합계 18언더파 270타로 우승해 상금 50만달러(약 5억6000만원)를 챙겼다. 지난해 9월 IWIT 챔피언십 이후 1년2개월 만에 우승한 톰슨은 투어 통산 10승을 채웠고 매년 1승 이상 거두는 꾸준함을 보여줬다.

이 대회 전 이미 상금왕과 올해의 선수상, 최다 톱10 진입(리더스 톱10) 등 주요 부문 1위를 확정했던 쭈타누깐은 이 대회 후 평균 타수까지 차지했다. 또 한 시즌 성적을 포인트로 환산하는 CME 글로브 포인트 부문에서 1위 자리를 지켜 보너스 100만달러를 손에 넣었다. CME 글로브 포인트가 신설된 2014년 이후 한 선수가 CME 포인트를 포함해 주요 부문을 휩쓴 건 쭈타누깐이 처음이다.

쭈타누깐은 이번 대회 성적으로 4주 연속 세계랭킹 1위를 지키게 됐다. 올해 시즌 상금 274만3949달러, CME 포인트 보너스 100만달러, 최다 톱10 보너스 상금 10만달러를 더해 각종 상금으로만 약 384만달러(약 43억3000만원)를 벌어들인 쭈타누깐은 지금 같은 활약을 이어갈 경우 전설인 안니카 소렌스탐(스웨덴), 로레나 오초아(멕시코)의 계보를 이을 것으로 보인다. 쭈타누깐은 “오늘은 정말 제가 자랑스럽다”며 “이보다 더 좋은 성적을 낼 수는 없을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국 선수 9승 합작, 고진영 신인상

유소연(28)은 이날 최종합계 13언더파 275타로 공동 3위, 박성현(25)은 6언더파 282타로 공동 15위에 올랐다. 한화그룹의 후원을 받는 넬리 코다(미국)가 선두에 4타 뒤진 2위에 올랐다.

한국 선수들은 올해 32개 대회에서 9승을 합작하며 시즌을 마쳤다. 지난해 거둔 15승에는 못 미치지만 올해 미국(9승)과 함께 최다승을 거둔 국가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박성현이 메이저대회인 KPMG 위민스 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고 고진영(23)이 신인상을 받는 성과도 거뒀다. 한국은 2015년(15승)과 2016년(9승), 2017년(15승)에 이어 4년 연속 LPGA투어 최다승 국가로 등극했다.

조희찬 기자 etwood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