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세계 통신장비 시장을 장악해 가는 중국을 겨냥해 초강경 조치를 들고나왔다.

22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 안보동맹국 정부와 기업에 사실상 화웨이, ZTE 등 중국산 통신장비를 쓰지 말 것을 주문했다. 사이버 공격이나 스파이 활동 등에 활용될 수 있다는 이유로, 동맹국과 공동으로 중국산 통신장비 고사작전을 펴기 시작한 것이다.

미래 사회의 신경 중추가 될 5세대(5G) 통신기술 상용화를 앞두고 기술 패권을 차지하려는 미·중 신냉전이 심화하고 있다.

불붙은 정보기술 패권 전쟁

美 '정보기술 패권 전쟁' 확대…중국산 5G장비 고사작전 돌입
미국 행정부 관료는 WSJ에 “5G 네트워크가 사이버 공격에 더 취약할 수도 있다”며 “통신 인프라에서의 사이버 위협과 관련해 각국과 의견을 나누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은 특히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국가들을 집중 설득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산 장비를 사용하지 않는 국가들에 한해 지원을 늘리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미 국방부는 중요 정보는 자체 위성통신을 활용하지만, 일반적인 통신은 민간 네트워크에 의존하고 있다.

미국의 중국산 통신장비 고사작전이 기술 냉전의 일환이라는 해석이 많다. 미국은 2012년 화웨이 장비가 중국 정부의 스파이 활동에 악용될 수 있다는 의회 보고서가 나온 뒤 미 통신업체들이 화웨이 장비를 이용하는 것을 막고 있다.

미국 언론들은 이번 조치는 미·중 무역전쟁의 또 다른 전선일 수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기술 도둑질을 막겠다’며 중국 기업들의 미국 투자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고 중국산 기술 제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화웨이는 성명을 통해 “(미국 정부의) 이 같은 행동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며 “신뢰를 바탕으로 화웨이 제품은 170여 개국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밝혔다.

확산되는 화웨이 기피 분위기

5G는 이동통신뿐만 아니라 자율주행차, 가전, 스마트홈, 심지어 공장 설비까지 연결할 사물인터넷의 기반이 되는 통신망 기술이다. 세계 통신업체들은 5G 통신망 구축을 위해 장비 도입을 서두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중국산 통신장비 봉쇄 작전이 본격화돼 글로벌 통신업계와 장비업계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됐다.

화웨이는 세계 통신장비 시장점유율 1위다. 2위 스웨덴 에릭슨, 3위 핀란드 노키아보다 가격이 30%가량 저렴한 데다 5G에선 기술도 앞선 것으로 평가된다. ZTE도 4위다.

미 동맹국들 사이에선 진작부터 중국산 장비 기피 움직임이 생겨났다. 호주 정부는 지난 8월 화웨이를 5G 네트워크에서 배제하기로 결정했고 영국 정부도 최근 자국 통신사에 “5G 장비 공급 업체가 국가 안전을 위해 바뀔 수 있다”며 조사를 시작했다. 독일과 일본, 뉴질랜드도 화웨이를 5G 통신장비 입찰에서 배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한국에선 5G 통신망 구축과 관련해 통신 3사 중 SK텔레콤과 KT는 삼성전자, 노키아, 에릭슨 장비를 쓰기로 했다. 화웨이 장비 도입을 검토했지만 최종 선정에선 제외했다. LG유플러스는 화웨이까지 4개사 장비를 모두 사용키로 하고 서울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다만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모두 미 정부로부터 화웨이와 관련해 연락을 받은 적은 없다고 밝혔다.

화웨이는 농협은행이 내년 초 시작하는 통신망 고도화 사업의 전송장비 납품 업체로도 선정된 상태다. 농협은행 관계자는 “지방의 작은 마을까지 모두 연결하기 위해 KT를 사업자로 선정했는데 KT에 납품하는 업체가 화웨이”라며 “다만 보안에 유의해 달라고 요구했으며 KT로부터 관련 공문도 받았다”고 말했다.

뉴욕=김현석 특파원/이승우/정지은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