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 본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이슬기 씨.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 본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이슬기 씨.
프랑스 화단에서 활동하는 이슬기 씨(46)가 파리에 건너간 건 1992년이다. 당시 지인에게서 오방색 누빔 이불을 선물받았다. 색깔이 곱고 화려해 오랫동안 품고 살았다. 프랑스 친구들에게 선물하면 좋아할 것 같아 서울을 찾을 때마다 이불을 구입해 갔다. 이불을 덮고 자면 꿈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상상도 했다. 이불을 소재로 현대인의 복잡한 일상을 간결한 시처럼 시각화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가족공동체가 공유하는 이불에 관한 이야기를 기하학적 미학으로 재해석하며 20여 년을 매달렸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 본관(현대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이씨의 개인전 ‘다마스스(장인의 바람)’는 한국의 전통 이불에서 우러나오는 다채로운 스토리와 의식, 고정관념을 현대미술로 승화해 보여주는 자리다. 전시장에는 특유의 해학적인 시선, 기하학적 패턴과 색의 힘을 통해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원초적으로 되돌려놓은 작품 20여 점이 걸렸다.

28일 전시장에서 만난 이씨는 “이불 프로젝트는 우리가 쓰는 물건들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며 “단순히 물질을 도구화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과 교감하고 물질성을 완벽히 이해하려는 작업”이라고 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수학한 이씨는 2001년 대안공간 ‘파리 프로젝트룸’을 운영했다. 광주비엔날레(2007, 2014년)와 보르도비엔날레(2009년) 등에 참가하며 국제 미술계에서도 주목받았다. 최근에는 명품 패션업체 에르메스, 가구 전문 브랜드 이케아와 컬래버레이션 작업을 하고 있다.

누빔 이불을 전시장 벽에 걸거나 바닥에 펼쳐 보여주는 그의 출품작은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낸다. 화려한 색에 취해 다가가면 색과 문양을 맞춘 선들이 반듯하고 질서있게 뽐낸다. 특별한 색의 힘을 보여주며 인간과 사물의 관계도 자연스럽게 이어준다. 이씨는 “신화, 설화, 속담 등에 숨어 있는 스토리를 기하학적으로 해석한 작품들은 아티스트와 장인의 합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작가는 ‘불난 집에 부채질한다’ ‘엎질러진 물’ ‘싹이 노랗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등 전통 속담을 스케치해 통영 누비 장인에게 전달한다. 그러면 장인은 진주 명주로 한땀 한땀 바느질해 완성해나간다. 결국 일상생활에서 흔히 보는 이불은 완벽한 화음을 구축한 오케스트라처럼 한 폭의 추상화나 개념미술로 변주된다.

작가는 처음 시도한 ‘나무 체 프로젝트 오(O)’도 들고나왔다. 프랑스 중부지역 나무 체 장인과 협업한 작품으로 친환경 공공미술 가능성을 제시해 주목된다. 가로 88㎝ 원형의 설치 작품은 30년 된 너도밤나무로 제작했다. 작품 제목 ‘오(O)’는 하늘을 뜻하는 ‘오 시엘(au ciel)’의 ‘au’와 같은 발음에서 따왔다.

1층 전시장 바닥에 설치한 ‘은행잎 프로젝트 B’도 눈길을 끈다. 가로 6m, 세로 12m 규모의 바닥을 은행잎으로 가득 채워 밟을 때마다 사그락사그락 낙엽 밟는 소리를 들려준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