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마침표 찍은 부시…中蘇와 화해 길닦고 걸프戰 승리 이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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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전 승전보' 최대 치적…경기 침체·재정적자 등 국내 요인에 재선 실패
고르바초프와 '동서 화합' 선언…'아들 부시'와 함께 두번째 父子 대통령
2차 대전 참전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현…부통령으로 레이건 8년 보좌 30일(현지시간) 타계한 미국 41대 조지 허버트 워커(H.W.) 부시 전 대통령은 냉전에 마침표를 찍은 한 시대의 아이콘이자 정치 명문가인 부시 가문의 수장으로서 미 현대 정치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는 1924년 6월 12일 매사추세츠 밀턴에서 주(州) 상원의원 출신 은행가인 프레스콧 부시와 도러시 사이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명문 필립스 고교를 졸업한 부시 전 대통령은 동부 아이비리그 명문인 예일대학의 입학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라는 가풍에 따라 당장 예일대에 입학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원 입대해 해군 항공모함 뇌격기 조종사로 위험한 임무를 수행했다.
입대 당시 그는 18세로 미 해군 최연소 전투기 조종사가 됐다.
1944년에는 태평양에서 자신의 어뢰폭격기가 일본 방공포에 맞아 격추되자 낙하산으로 탈출, 바다에 표류하다가 잠수함에 구조되는 등 생사의 고비를 넘기면서 2차 대전 영웅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2차 대전에 참전한 미국의 마지막 대통령이기도 하다.
이런 그의 공로를 기려 미 해군은 그의 이름을 딴 항공모함을 취역시키기도 했다. 1948년 예일대 경제학부를 졸업한 뒤 사업에 뛰어든 그는 1953년 텍사스 주 휴스턴에서 석유 회사를 공동 창업해 경영했다.
1964년에는 정계 투신을 위해 상원의원에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고, 2년 뒤인 1966년 하원의원 선거(텍사스 제7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됨으로써 정계에 입문했다.
1970년에는 다시 상원의원에 출마했으나 또다시 낙선했다.
그는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 의해 유엔 대사(1971∼73년)로 발탁된 이래 공화당전국위원장(1973∼74년), 국무부 주 베이징 미국 연락사무소장(1974∼75년), 중앙정보국(CIA) 국장(1976∼77년)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관직 경험을 쌓았다.
특히 그는 젊은 시절부터 중국과 상당한 인연을 쌓았다.
그는 인기있는 자리였던 주영, 주프랑스 대사관 근무 기회를 마다하고 당시로서는 생소한 주중 연락사무소 초대 소장을 맡아 미중 국교 정상화 과정에 깊숙히 관여함으로써 양국 외교관계 수립의 길을 닦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0년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레이건 당시 후보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지명된 그는 레이건 대통령 재임 8년간 부통령으로 함께 하며 차기의 대망을 키웠다.
결국 그는 1988년 대선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민주당 후보였던 마이클 듀카키스 매사추세츠 주지사를 누르고 당선, 이듬해 제4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라크에 침략당한 쿠웨이트를 해방한다는 명분으로 시작한 '걸프 전쟁'에서 약 43만 명의 대군을 파병해 승리를 거둔 것이 부시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치적으로 꼽힌다.
33개국 약 12만 명의 다국적군까지 합세한 대(對) 이라크 총공세는 '사막의 폭풍'이라는 작전명으로 전쟁사에 남았다.
한국도 당시 군 의료진과 수송기 등을 파견하며 다국적군에 참여했다.
그는 이라크전 승리 후 전임자인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지만 이후 경기 침체와 만성적인 재정 적자 등 국내 경제적 요인으로 민심을 잃어 1992년 대선에 빌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져 재선에 실패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거대한 세계사적 변화 물결의 중심에서 4년 임기를 보냈다.
'거대 공산 제국'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이 붕괴하고 독일 통일을 시작으로 동유럽이 잇달아 자유화의 물결을 탔다.
부시 전 대통령은 탈(脫) 냉전의 분위기가 싹트던 시기에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1989년 12월 미·소 정상회담을 통해 40여 년에 걸친 냉전의 종식과 동서 화합을 선언했다.
비록 재선에는 실패했지만 장남 조지 W. 부시를 제43대 대통령으로 키워내는 등 미국적 전통 가치를 존중하는 부시 가문을 케네디가(家) 못지않은 최고의 정치 명문가로 만들었다.
이들 두 명의 부시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두 번째 '부자(父子)'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차남 젭도 플로리다 주지사를 지냈다. 퇴임한 뒤 한때 정적이던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내외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는 등 초당파적 행보를 보여주며 많은 미 정치인들의 본보기가 됐다는 평을 받았다.
2012년 혈관 파킨슨증후군 투병 사실을 공개한 이후에는 오랜 기간 입퇴원을 반복하며 병마와 싸워왔다.
부시 전 대통령은 지난 4월 92세를 일기로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 바버라 여사와 남다른 금슬을 보여준 것으로도 잘 알려졌다.
바버라 여사는 남편과 아들을 모두 대통령으로 키워낸 '국민 할머니'로,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영부인 중 한명으로 꼽혔다.
1945년 1월 결혼해 슬하에 4남 1녀를 둔 두 사람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오랜 기간(73년) 결혼 생활을 이어온 대통령 부부라는 기록도 남겼다.
부시 전 대통령은 부인이 하늘나라로 떠난 지 7개월여만에 부인 곁으로 가게 된 셈이다. /연합뉴스
고르바초프와 '동서 화합' 선언…'아들 부시'와 함께 두번째 父子 대통령
2차 대전 참전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현…부통령으로 레이건 8년 보좌 30일(현지시간) 타계한 미국 41대 조지 허버트 워커(H.W.) 부시 전 대통령은 냉전에 마침표를 찍은 한 시대의 아이콘이자 정치 명문가인 부시 가문의 수장으로서 미 현대 정치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는 1924년 6월 12일 매사추세츠 밀턴에서 주(州) 상원의원 출신 은행가인 프레스콧 부시와 도러시 사이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명문 필립스 고교를 졸업한 부시 전 대통령은 동부 아이비리그 명문인 예일대학의 입학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라는 가풍에 따라 당장 예일대에 입학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원 입대해 해군 항공모함 뇌격기 조종사로 위험한 임무를 수행했다.
입대 당시 그는 18세로 미 해군 최연소 전투기 조종사가 됐다.
1944년에는 태평양에서 자신의 어뢰폭격기가 일본 방공포에 맞아 격추되자 낙하산으로 탈출, 바다에 표류하다가 잠수함에 구조되는 등 생사의 고비를 넘기면서 2차 대전 영웅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2차 대전에 참전한 미국의 마지막 대통령이기도 하다.
이런 그의 공로를 기려 미 해군은 그의 이름을 딴 항공모함을 취역시키기도 했다. 1948년 예일대 경제학부를 졸업한 뒤 사업에 뛰어든 그는 1953년 텍사스 주 휴스턴에서 석유 회사를 공동 창업해 경영했다.
1964년에는 정계 투신을 위해 상원의원에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고, 2년 뒤인 1966년 하원의원 선거(텍사스 제7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됨으로써 정계에 입문했다.
1970년에는 다시 상원의원에 출마했으나 또다시 낙선했다.
그는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 의해 유엔 대사(1971∼73년)로 발탁된 이래 공화당전국위원장(1973∼74년), 국무부 주 베이징 미국 연락사무소장(1974∼75년), 중앙정보국(CIA) 국장(1976∼77년)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관직 경험을 쌓았다.
특히 그는 젊은 시절부터 중국과 상당한 인연을 쌓았다.
그는 인기있는 자리였던 주영, 주프랑스 대사관 근무 기회를 마다하고 당시로서는 생소한 주중 연락사무소 초대 소장을 맡아 미중 국교 정상화 과정에 깊숙히 관여함으로써 양국 외교관계 수립의 길을 닦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0년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레이건 당시 후보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지명된 그는 레이건 대통령 재임 8년간 부통령으로 함께 하며 차기의 대망을 키웠다.
결국 그는 1988년 대선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민주당 후보였던 마이클 듀카키스 매사추세츠 주지사를 누르고 당선, 이듬해 제4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라크에 침략당한 쿠웨이트를 해방한다는 명분으로 시작한 '걸프 전쟁'에서 약 43만 명의 대군을 파병해 승리를 거둔 것이 부시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치적으로 꼽힌다.
33개국 약 12만 명의 다국적군까지 합세한 대(對) 이라크 총공세는 '사막의 폭풍'이라는 작전명으로 전쟁사에 남았다.
한국도 당시 군 의료진과 수송기 등을 파견하며 다국적군에 참여했다.
그는 이라크전 승리 후 전임자인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지만 이후 경기 침체와 만성적인 재정 적자 등 국내 경제적 요인으로 민심을 잃어 1992년 대선에 빌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져 재선에 실패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거대한 세계사적 변화 물결의 중심에서 4년 임기를 보냈다.
'거대 공산 제국'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이 붕괴하고 독일 통일을 시작으로 동유럽이 잇달아 자유화의 물결을 탔다.
부시 전 대통령은 탈(脫) 냉전의 분위기가 싹트던 시기에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1989년 12월 미·소 정상회담을 통해 40여 년에 걸친 냉전의 종식과 동서 화합을 선언했다.
비록 재선에는 실패했지만 장남 조지 W. 부시를 제43대 대통령으로 키워내는 등 미국적 전통 가치를 존중하는 부시 가문을 케네디가(家) 못지않은 최고의 정치 명문가로 만들었다.
이들 두 명의 부시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두 번째 '부자(父子)'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차남 젭도 플로리다 주지사를 지냈다. 퇴임한 뒤 한때 정적이던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내외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는 등 초당파적 행보를 보여주며 많은 미 정치인들의 본보기가 됐다는 평을 받았다.
2012년 혈관 파킨슨증후군 투병 사실을 공개한 이후에는 오랜 기간 입퇴원을 반복하며 병마와 싸워왔다.
부시 전 대통령은 지난 4월 92세를 일기로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 바버라 여사와 남다른 금슬을 보여준 것으로도 잘 알려졌다.
바버라 여사는 남편과 아들을 모두 대통령으로 키워낸 '국민 할머니'로,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영부인 중 한명으로 꼽혔다.
1945년 1월 결혼해 슬하에 4남 1녀를 둔 두 사람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오랜 기간(73년) 결혼 생활을 이어온 대통령 부부라는 기록도 남겼다.
부시 전 대통령은 부인이 하늘나라로 떠난 지 7개월여만에 부인 곁으로 가게 된 셈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