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이름이 유래된 인왕산 선바위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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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향기
서울관광재단과 함께하는 숨겨진 서울이야기 (4)
역사문화유산
서울관광재단과 함께하는 숨겨진 서울이야기 (4)
역사문화유산
조선 왕조 500년 동안 도읍지였던 한양에서 오늘날 대한민국 수도로 이어지는 서울은 곳곳에 오랜 역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서울의 모습이 크게 변하면서 문화유산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게 됐다. 역사학자 E H 카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서울의 역사를 알아야 오늘의 서울을 더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흔하게 알려져 있지만 좀처럼 잘 찾지 않거나 혹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서울의 문화유산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조선 역대 왕과 왕비 모신 신성한 공간 종묘
종로구에 있는 종묘는 누구나 알고 있는 장소지만 의외로 주변에서 둘러본 사람이 없는 독특한 공간이다.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다. 유교를 기본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 왕조의 예법에 따르면 국가의 도읍지에는 세 곳의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왕이 머무는 궁궐과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는 종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그것이다. 조선 태조가 한양을 도읍지로 정하고 가장 먼저 세운 곳이 종묘였다. 외대문을 들어서서 고요한 숲이 우거진 신로를 따라 걷다 보면 신성한 공간인 정전을 만난다. 정전은 왕과 왕비가 승하 후 궁궐에서 삼년상을 치른 다음 신주를 모셔 놓은 건물이다. 19칸의 태실에 모두 49위의 신주를 봉안했다.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를 비롯해 왕 19명과 왕비 30명의 신주를 모셨다. 조선의 왕은 모두 27명이지만 공덕이 있는 19명의 왕과 그의 왕비들만 정전에 봉안했다.
정전은 가로 길이가 101m로 동양의 목조건물 중 가장 길다. 정전 건물 앞에는 크기와 모양이 다른 돌을 쌓아 만든 단이 있는데, 이 단을 ‘월대’라고 한다. 월대 위에서 정전의 웅장함이 드러나고, 종묘 제례 의식이 치러진다.
정전은 장엄하고 아름답다. 길게 펼쳐진 묘정 월대는 안정을, 건물 앞에 줄지어 늘어선 기둥은 왕위의 영속을, 수평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지붕은 무한을 상징한다. 왕이 살았던 궁궐의 건축이 화려하다면 왕의 혼을 모신 종묘의 건축은 아무런 장식 없이 간결하다. 절제된 것에서 숭고한 아름다움과 신성함이 느껴진다.
“서양에 파르테논 신전이 있다면 동양에는 종묘가 있다”고 극찬할 만큼 아름다운 종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던 사직
경복궁 서쪽 사직동에 있는 사직단은 조선시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아 조선 왕조를 건국한 태조는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면서 1395년 궁궐 동쪽에 종묘를, 서쪽에 사직단을 설치했다. 종묘가 왕의 영혼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면 사직단은 백성의 생사를 관장하는 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사직단에서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와 극심한 가뭄 및 홍수가 났을 때 제사를 지냈다.
사극 드라마 속에서 흔히 들었던 “전하, 종묘사직을 보존하소서”라고 하는 말은 조선이 국가의 근본을 종묘와 사직에 뒀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종묘사직은 조선 왕조와 나라 자체를 의미했다.
사직단에는 동쪽에 사단(社壇), 서쪽에 직단(稷壇)을 배치했는데, 나란히 놓여 있는 두 단의 모양은 정사각형이고 높이는 약 1m다. 단 주위에는 유라는 낮은 담을 둘렀다. 그 뒤로 사방에 4개의 신문(神門)을 설치하고 담을 둘렀다. 이중으로 담을 설치할 만큼 사직단은 신성한 곳이었다. 외부에는 제사 준비를 위한 부속 시설을 뒀다.
일제강점기에 제사가 폐지된 뒤 부속 건물들이 철거됐다. 지금은 입구에 세워진 문과 제단만 남긴 채 공원으로 조성됐다.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1980년대에 담장과 부속 시설 일부를 복원했고 지금도 여전히 복원사업을 하고 있다.
고종 황제가 하늘에 제사 지내던 환구단
중구 소공동에 있는 환구단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서울 중심가에 있는 8각 지붕의 건물은 조선 후기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남별궁이 있던 자리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하면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환구단을 지었다. 당시 고종 황제가 머물던 황궁, 덕수궁과 마주 보고 있다. 환구단은 3층의 원형 제단과 하늘신의 위패를 모시는 3층 팔각 건물인 황궁우, 돌로 만든 북과 문이 있었다. 3개의 돌북, 석고에 새겨진 용무늬는 조선 후기 최고의 조각으로 꼽힌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조선총독부가 황궁우, 돌로 만든 북, 삼문, 협문만 남기고 환구단을 철거했다. 이듬해 그 자리에 조선경성철도호텔을 지었다. 현재는 조선호텔 경내에 황궁우와 석고, 3개의 아치가 있는 석조 대문만 보존돼 있다.
남산 산신 제사터 국사당, 서울의 유래지 선바위
종로구 무악동에 있는 국사당은 태조 이성계가 남산의 산신에게 벼슬을 내린 목멱대왕(木覓大王)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섬세한 민속 벽화가 그려진 집들을 지나 가파른 산길을 올라야 볼 수 있는 사당은 목멱신사로도 불렸다. 국사당은 원래 남산 팔각정 자리에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남산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1925년 지금 위치로 옮겨졌다. 암반 위에 지어진 국사당이 인왕산으로 옮겨진 이유는 인왕산이 명당이기도 하고 무속신으로 모시고 있는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가 기도하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사당 안에는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무신도가 걸려 있다. 지금도 국사당에서는 내림굿, 치병굿, 제수굿 같은 굿판이 벌어지고 있다.
국사당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특이한 봉우리처럼 보이는 바위가 있다. 바위는 풍화작용으로 여기저기 구멍이 파여 있지만 마치 스님이 장삼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여 참선한다는 ‘선(禪)’자를 따서 선바위라고 불린다. 독특한 모양의 바위에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도성을 쌓을 때 조선 개국 공신이던 무학대사와 정도전에 얽힌 이야기다. 무학대사는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둘 수 있게 설계하려 했고 정도전은 성 밖에 두도록 설계하려 했다. 이에 정도전이 선바위를 도성 안에 들이면 불교가 번성하고 도성 밖에 두면 유교가 흥할 것이라고 했다. 결국 태조는 선바위를 도성 밖에 두게 했다. 무학대사가 이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이제부터 승도들은 선비들의 책 보따리나 지고 따라다닐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다른 설화로는 서울의 명칭이 유래된 이야기다. 무학대사는 선바위를 서울 도성 안으로 품자고 하고 정도전은 서울 도성 밖에 두자고 설전을 벌였다. 태조 이성계가 고민하다 눈 내린 인왕산을 보러 정도전과 나섰다. 그때 선바위 안쪽에는 눈이 녹아 있고, 선바위에는 눈이 녹지 않아 선바위는 성 밖으로 남겨지게 됐다. 그런 이유로 서울 도성에 안과 밖이 생기게 됐다고 전해진다. ‘서울’이라는 지명은 눈 울타리, ‘설울’이라고 부르다가 서울이 됐다고 한다.
독특한 형상의 바위 모습이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 모습 같기도 하고, 부부가 나란히 머리를 기댄 것 같다고 해서 부부 바위라고도 한다. 선바위는 일제강점기 남산에 있던 국사당을 그 아래로 옮긴 뒤부터 국사당과 함께 무신(巫信)을 모시는 신앙의 대상이 됐다.
글·사진=이솔 여행작가 leesoltour@naver.com
조선 역대 왕과 왕비 모신 신성한 공간 종묘
종로구에 있는 종묘는 누구나 알고 있는 장소지만 의외로 주변에서 둘러본 사람이 없는 독특한 공간이다.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다. 유교를 기본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 왕조의 예법에 따르면 국가의 도읍지에는 세 곳의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왕이 머무는 궁궐과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는 종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그것이다. 조선 태조가 한양을 도읍지로 정하고 가장 먼저 세운 곳이 종묘였다. 외대문을 들어서서 고요한 숲이 우거진 신로를 따라 걷다 보면 신성한 공간인 정전을 만난다. 정전은 왕과 왕비가 승하 후 궁궐에서 삼년상을 치른 다음 신주를 모셔 놓은 건물이다. 19칸의 태실에 모두 49위의 신주를 봉안했다.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를 비롯해 왕 19명과 왕비 30명의 신주를 모셨다. 조선의 왕은 모두 27명이지만 공덕이 있는 19명의 왕과 그의 왕비들만 정전에 봉안했다.
정전은 가로 길이가 101m로 동양의 목조건물 중 가장 길다. 정전 건물 앞에는 크기와 모양이 다른 돌을 쌓아 만든 단이 있는데, 이 단을 ‘월대’라고 한다. 월대 위에서 정전의 웅장함이 드러나고, 종묘 제례 의식이 치러진다.
정전은 장엄하고 아름답다. 길게 펼쳐진 묘정 월대는 안정을, 건물 앞에 줄지어 늘어선 기둥은 왕위의 영속을, 수평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지붕은 무한을 상징한다. 왕이 살았던 궁궐의 건축이 화려하다면 왕의 혼을 모신 종묘의 건축은 아무런 장식 없이 간결하다. 절제된 것에서 숭고한 아름다움과 신성함이 느껴진다.
“서양에 파르테논 신전이 있다면 동양에는 종묘가 있다”고 극찬할 만큼 아름다운 종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던 사직
경복궁 서쪽 사직동에 있는 사직단은 조선시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아 조선 왕조를 건국한 태조는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면서 1395년 궁궐 동쪽에 종묘를, 서쪽에 사직단을 설치했다. 종묘가 왕의 영혼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면 사직단은 백성의 생사를 관장하는 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사직단에서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와 극심한 가뭄 및 홍수가 났을 때 제사를 지냈다.
사극 드라마 속에서 흔히 들었던 “전하, 종묘사직을 보존하소서”라고 하는 말은 조선이 국가의 근본을 종묘와 사직에 뒀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종묘사직은 조선 왕조와 나라 자체를 의미했다.
사직단에는 동쪽에 사단(社壇), 서쪽에 직단(稷壇)을 배치했는데, 나란히 놓여 있는 두 단의 모양은 정사각형이고 높이는 약 1m다. 단 주위에는 유라는 낮은 담을 둘렀다. 그 뒤로 사방에 4개의 신문(神門)을 설치하고 담을 둘렀다. 이중으로 담을 설치할 만큼 사직단은 신성한 곳이었다. 외부에는 제사 준비를 위한 부속 시설을 뒀다.
일제강점기에 제사가 폐지된 뒤 부속 건물들이 철거됐다. 지금은 입구에 세워진 문과 제단만 남긴 채 공원으로 조성됐다.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1980년대에 담장과 부속 시설 일부를 복원했고 지금도 여전히 복원사업을 하고 있다.
고종 황제가 하늘에 제사 지내던 환구단
중구 소공동에 있는 환구단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서울 중심가에 있는 8각 지붕의 건물은 조선 후기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남별궁이 있던 자리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하면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환구단을 지었다. 당시 고종 황제가 머물던 황궁, 덕수궁과 마주 보고 있다. 환구단은 3층의 원형 제단과 하늘신의 위패를 모시는 3층 팔각 건물인 황궁우, 돌로 만든 북과 문이 있었다. 3개의 돌북, 석고에 새겨진 용무늬는 조선 후기 최고의 조각으로 꼽힌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조선총독부가 황궁우, 돌로 만든 북, 삼문, 협문만 남기고 환구단을 철거했다. 이듬해 그 자리에 조선경성철도호텔을 지었다. 현재는 조선호텔 경내에 황궁우와 석고, 3개의 아치가 있는 석조 대문만 보존돼 있다.
남산 산신 제사터 국사당, 서울의 유래지 선바위
종로구 무악동에 있는 국사당은 태조 이성계가 남산의 산신에게 벼슬을 내린 목멱대왕(木覓大王)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섬세한 민속 벽화가 그려진 집들을 지나 가파른 산길을 올라야 볼 수 있는 사당은 목멱신사로도 불렸다. 국사당은 원래 남산 팔각정 자리에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남산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1925년 지금 위치로 옮겨졌다. 암반 위에 지어진 국사당이 인왕산으로 옮겨진 이유는 인왕산이 명당이기도 하고 무속신으로 모시고 있는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가 기도하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사당 안에는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무신도가 걸려 있다. 지금도 국사당에서는 내림굿, 치병굿, 제수굿 같은 굿판이 벌어지고 있다.
국사당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특이한 봉우리처럼 보이는 바위가 있다. 바위는 풍화작용으로 여기저기 구멍이 파여 있지만 마치 스님이 장삼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여 참선한다는 ‘선(禪)’자를 따서 선바위라고 불린다. 독특한 모양의 바위에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도성을 쌓을 때 조선 개국 공신이던 무학대사와 정도전에 얽힌 이야기다. 무학대사는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둘 수 있게 설계하려 했고 정도전은 성 밖에 두도록 설계하려 했다. 이에 정도전이 선바위를 도성 안에 들이면 불교가 번성하고 도성 밖에 두면 유교가 흥할 것이라고 했다. 결국 태조는 선바위를 도성 밖에 두게 했다. 무학대사가 이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이제부터 승도들은 선비들의 책 보따리나 지고 따라다닐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다른 설화로는 서울의 명칭이 유래된 이야기다. 무학대사는 선바위를 서울 도성 안으로 품자고 하고 정도전은 서울 도성 밖에 두자고 설전을 벌였다. 태조 이성계가 고민하다 눈 내린 인왕산을 보러 정도전과 나섰다. 그때 선바위 안쪽에는 눈이 녹아 있고, 선바위에는 눈이 녹지 않아 선바위는 성 밖으로 남겨지게 됐다. 그런 이유로 서울 도성에 안과 밖이 생기게 됐다고 전해진다. ‘서울’이라는 지명은 눈 울타리, ‘설울’이라고 부르다가 서울이 됐다고 한다.
독특한 형상의 바위 모습이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 모습 같기도 하고, 부부가 나란히 머리를 기댄 것 같다고 해서 부부 바위라고도 한다. 선바위는 일제강점기 남산에 있던 국사당을 그 아래로 옮긴 뒤부터 국사당과 함께 무신(巫信)을 모시는 신앙의 대상이 됐다.
글·사진=이솔 여행작가 leesoltou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