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정권은 경제로 기억된다
“방향은 맞지만 속도조절이 필요하다.” 요즘 정부 여당 핵심 인사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문재인 정부의 각종 정책은 ‘가야 할 방향’인데 속도가 빠르다는 얘기다. 이낙연 총리가 그제 기자단 송년만찬에서 재차 강조했고,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도 인사청문회에서 최저임금을 두고 같은 말을 했다.

하지만 ‘방향’의 정의부터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최저임금 인상은 너무도 당연해 ‘방향’이랄 것도 없다. 1989년 제도를 도입한 이래 매년 올랐다. 진짜 ‘방향’은 임금을 올리고 가격을 통제해 가처분소득을 높여 성장을 이룬다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경제원리에 맞지 않고, 세계 어디서도 검증된 적 없고, 현실에서 허다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방향이 잘못되면 속도는 의미 없다”는 간디의 말처럼 과속 이전에 방향이 문제다.

정부가 내건 ‘공정, 정의, 평등, 포용, 격차 해소, 약자 배려…’ 같은 명분에 누가 반대하겠는가. 이 역시 방향이 아닌 당연한 지향점이다. 진짜 방향은 이를 ‘어떻게(how)’ 실천할 것인가에 있다. 국민은 정부를 방향·의도·취지로 예비평가를 해도 최종평가는 ‘결과’를 보고 내린다. 결과가 나쁘면 그 방향과 의도까지 의심한다. 경제난과 지지율 하락을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다.

송년회 자리마다 허물어지는 경제 속에서 겪고 있는 고통과 체험담이 쏟아진다. 엊그제 만난 반월공단의 A기업 대표는 일부 라인을 베트남으로 이전키로 결정했단다. “올해 매출이 10%, 이익은 30%나 줄었는데 또 임금을 10% 올려달라니 버틸 재간이 없다. 일회성 이전비용은 인건비 절감으로 1~2년이면 뽑는다. 회계법인에 매물로 내놨는데 요즘 번호표를 받아야 할 정도란다.”

남동공단 B은행 지점장 얘기는 더 구체적이다. “외형 수십억원의 소기업부터 도미노처럼 어려워지는 게 눈에 보인다. 매출이 반 토막, 3분의 1 토막 난 공장이 수두룩하다. 한국GM의 1차 협력업체는 매출이 작년 4500억원에서 올해 1500억원으로 줄어 주거래은행 지점장이 매일 공장에 나가 지키고 앉아 있다.”

크고 작은 상공인들을 오래 지켜본 C세무사는 “물이 목까지 차 있는데 정부가 한 양동이를 부어 코까지 잠길 판이라고들 한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외환위기 때는 망치로 얻어맞은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서서히 삶아지는 냄비 속 개구리 같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집권 3년차를 맞는다. 반등의 기회이자 가장 위험한 시기다. 역대 정권마다 반환점을 도는 이 시기에 큰 곤욕을 치러 ‘3년차 증후군’이란 용어도 있다. 김영삼 정부는 대형 사고로, 김대중 정부는 각종 ‘게이트’로, 노무현 정부는 집값 폭등으로, 이명박 정부는 민간인 불법사찰로, 박근혜 정부는 비밀문건 파동으로 국정동력이 뚝 떨어졌다.

지난 정권의 실패로 얻은 반사이익도 유효기간이 지났다. 권력 내부 균열, 청와대 기강 해이에다 소위 촛불세력의 압박은 점점 거세진다. 이런 판국에 경제·민생 위기가 고조되면 그간 공들여온 남북한 관계조차 ‘남-남’ 문제로 변질되고 말 것이다. 선거가 없는 내년은 어쩌면 경제를 살릴 마지막 골든타임이다.

국민은 정권을 경제 성과로 평가하고 기억한다. 대내외 여건을 탓해 봐야 소용없다. 그런 운조차 정권의 실력으로 간주된다. 5공 시절이 그 무수한 역사의 질곡에도 불구하고 서민들에겐 ‘응답하라 1988’식으로 회고되는 이유다.

국민의 인내심은 길지 않다. ‘방향은 맞는데’라면서 ‘뼈아프다, 아픈 지점이다’ 따위를 늘어놓는 소리는 더 이상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주한 유럽상공회의소가 최근 백서를 통해 알려줬다. 정책 수립 시 가장 중요한 네 가지 원칙이 ‘일관성, 예측가능성, 신뢰성, 투명성’이라는 대목이다. 이 원칙만 지켜도 경제 환경이 확 달라질 것이다. 정부의 책무는 평론이나 실험이 아니라 입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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