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장 호황 기록(113개월)에 도전하던 미국 경제가 갑작스레 ‘R(recession·경기 침체)의 공포’에 휩싸였다. 뉴욕증시를 중심으로 이르면 내년, 늦어도 2020년 침체가 시작될 것이라는 예상이 퍼지며 심심찮게 폭락 장세가 연출되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 등으로 투자심리가 악화한 상황에서 과거 경기 침체 전에 발생한 장단기 미국 국채 수익률(금리) 곡선의 역전 조짐이 나타나고 있어서다. 하지만 미 중앙은행(Fed)과 국제통화기금(IMF)뿐만 아니라 월스트리트 금융회사들은 내년 미국 경기가 침체될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 통상전쟁 등의 변수를 감안하더라도 완만한 경기 둔화를 얘기하는 목소리가 다수다. 시장에 만연한 공포 분위기와는 다른 분석이다.
美경제 엄습한 'R의 공포'…월가 "쇼크 아닌 점진적 둔화로 봐야"
(1) 1년 내 美 경기 침체 가능성은

경기 침체를 예상하는 투자자들은 금리 인상, 기업 투자 감소, 주택시장 둔화, 재정 확대 곤란 등을 요인으로 든다.

Fed는 2015년 12월 이후 벌써 여덟 차례 연방기금금리(기준금리)를 올렸다. 지금도 호황 덕에 구인난에다 임금상승률이 높아지고 있어 기준금리가 추가 인상될 것이란 관측이 많다.

금리 인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많다. 과거 금리 인상이 침체를 불렀다는 이유에서다. 미국 주택시장은 지난달 가격이 하락하는 등 이미 꺾였고, 11월 차량 판매도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0.3% 줄었다.

지난 2년간 미국 경기를 떠받쳐온 연방정부 재정지출 확대도 마무리된다. 민주당이 하원 다수당을 차지해 더 이상 정부 지출 확대가 어렵다는 분석이다. 셰일 투자를 포함한 기업 투자는 무역전쟁에다 국제 유가 하락으로 확 꺾였다. 설비투자 증가율은 1분기 8.5%에서 3분기 0.4%로 낮아졌다.

여기에 지난 3분기 일본과 독일은 전분기 대비 마이너스 성장률을 보였고 중국은 2009년 금융위기 시절 이후 최저인 6.5% 성장에 그쳤다. 로버트 카플란 댈러스연방은행 총재는 “글로벌 성장세가 역풍이 돼 미국에도 파급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다수 월가 투자은행은 1년 이내 침체 확률이 매우 낮은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 등은 12개월 내 침체 가능성을 10% 수준으로, 3년 내 침체 가능성도 50% 이하로 전망했다. 뉴욕연방은행이 발표한 미국 경기 침체 확률도 10% 수준이다. 가장 높게 보는 곳은 JP모간으로 1년 내 침체 확률을 31%, 2년 후 침체 확률을 60% 이상으로 내다봤다.

과거 경기 침체는 대부분 경기 과열, 금리 인상, 유가 급등을 포함한 외부 충격이 촉발했다. 하지만 현재 이런 요인들이 침체를 촉발할 수준이 아니라는 게 투자은행들의 분석이다.

미국 실업률은 49년 만에 가장 낮지만, 물가 상승률은 2% 수준에 그치고 있다. 국제 유가도 급락한 상태다. Fed는 최근 기존의 점진적 금리 인상 기조를 수정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는 “미국 경제가 내년에도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며 “단기에 침체를 부를 요인을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미국의 내년 성장률이 3%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되는 올해엔 못 미치겠지만 2% 수준인 잠재성장률을 웃돌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2) 수익률 곡선 역전이 침체 신호인가

이달 들어 장단기 미 국채의 수익률 곡선이 급격히 좁혀지면서 경기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5년물과 2년물 금리는 이달 초 역전됐고 침체 신호로 곧잘 활용되는 10년물과 2년물의 금리 차이도 11일 10.9bp(1bp=0.01%포인트)로 좁혀졌다. 샌프란시스코연방은행에 따르면 1955년 이후 2년물과 10년물 수익률이 뒤집힌 10번의 사례 중 9번 경기 침체가 발생했다.

하지만 이번엔 금리 격차가 좁혀지거나 역전된 원인이 다르다는 분석이 많다. 장기채권 금리 하락이 경기 침체 전망 때문이 아니라 안전자산인 미 장기 국채에 대한 수요 증가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게다가 미 재무부는 올 들어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단기채권을 집중 발행하는 바람에 단기 금리가 급등했다. 메건 그린 매뉴라이프애셋매니지먼트 이코노미스트는 “거시경제 측면이 아니라 금융(투자) 요인으로 수익률 곡선이 평평해졌다”고 설명했다.

아마존 등 전자상거래 발달로 물가가 낮게 유지되고 있는 것도 과거와 다르다. 제롬 파월 Fed 의장은 “장단기 금리 차이가 과거에 비해 줄어든 수익률 곡선(일드커브) 평탄화가 나타나도 침체를 생각할 이유가 없다”고 여러 번 밝혔다.

(3) 기업 부채와 통상전쟁이 뇌관인가

2008년 금융위기의 뇌관이 됐던 모기지론(주택담보대출)처럼 과도한 기업 부채 등이 침체를 촉발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미국의 기업 부채는 2007년 4조9000억달러 수준에서 최근 9조1000억달러로 불어났다.

재닛 옐런 전 Fed 의장은 지난 10일 “과도한 기업 부채가 우려되지만 당장 위기를 일으킬 쇼크 요인은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금리가 오르고 있지만 여전히 연 2%대 수준인 데다 미국 기업들 실적이 개선돼 이자 대비 영업이익 비율인 이자보상배율이 양호하다는 이유에서다.

지정학적 위험 요인으로 꼽히는 미·중 통상전쟁도 실제 충격은 크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미국에서 나오고 있다. 골드만삭스 등은 미국이 중국산 수입품 전체에 25% 관세를 매겨도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을 0.1~0.2%포인트 정도 낮추는 수준에 그칠 것으로 보고 있다.

일부에선 침체가 오면 정책 대응 수단이 없다는 비관론을 내놓는다. Fed가 기준금리를 연 3% 이상으로 끌어올리기 전에 침체가 와서 통화정책을 쓰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배리 아이컨그린 버클리대 교수는 “다음 위기가 오면 지난 위기 때처럼 중앙은행은 양적완화를 하고 정부는 재정 부양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韓·美, 서로 다른 리세션 정의

美, GDP 절대규모가 2분기 연속 줄 때 리세션…韓, 증가율 감소여부 따져

리세션(recession·경기 침체)은 한국과 미국에서 사용하는 정의가 조금 다르다.

미국 국가경제연구국(NBER)은 실질 국내총생산(GDP)의 전분기 대비 증가율이 두 분기 연속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하면 침체로 본다. GDP 절대 규모가 연속적으로 줄어드는 상황이다.

한국은 실질 GDP 증가율이 두 분기 연속으로 감소하면 일반적으로 침체 신호로 받아들인다. GDP 절대 규모가 아니라 증가율 감소 여부를 따진다. 월가 관계자 “한국은 그동안 마이너스 성장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은 실질 GDP 증가율이 감소하면 침체가 아니라 경기 둔화(downturn)라고 부른다. 다만 최근처럼 분기 성장률이 연 3~4%에 달하는 등 비정상적으로 높은 상황에선 분기 성장률이 두 분기 연속으로 떨어져도 ‘둔화’로 보지 않고 ‘정점을 지났다’고 표현하는 게 일반적이다. 미국의 잠재성장률이 연 2% 수준인데, 현재 성장률이 이보다 훨씬 높기 때문이다.

뉴욕=김현석 특파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