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정권을 위한 과학'을 원하는가
우리나라는 1966년 설립된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를 필두로 한 정부출연연구소들을 갖고 있다. 초대 KIST 소장을 지낸 최형섭 박사는 정부연구소라고 하지 않고 ‘출연’이라는 말을 붙인 이유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기부’라는 말을 쓰는 게 좀 속된 표현 같아서 찾아낸 게 ‘출연’이었다.” 출연은 정부 간섭을 받지 않는 ‘연구 자율성’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연구계획은 부처 ‘승인’이 아니라 부처 ‘보고’로 끝났고, 정부 감사를 받지 않는 자체적인 회계처리도 보장받았다. 연구 자율성이라고 하면 미국, 독일 등 선진국을 떠올리지만 우리나라도 한때 그런 시절이 있었다.

정권이 바뀌자 또 임기가 끝나지 않은 정부출연연구소 기관장들이 줄줄이 옷을 벗거나 사퇴 압박을 받고 있다. DGIST(대구경북과학기술원), KAIST 등 교육과 연구를 병행하는 기관도 예외가 아니다. 그것도 국가의 본질은 정당한 폭력의 유일한 독점에 있다는 막스 베버의 고전적인 정의를 환기시켜 주기라도 하듯이 ‘감사’라는 폭력을 통해서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에 혹시나 했던 과학계는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감사가 국가의 정당한 폭력인지, 아닌지는 감사를 받아 본 사람들이 가장 잘 안다. 현장 연구자들은 국가 연구개발(R&D) 감사에 대해 “R&D 특성을 무시하고, 연구자를 범죄자 취급한다”고 말한다(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국가 R&D 감사의 이해와 시스템 개선에 관한 제언’). 후진적인 감사 풍토에서 ‘과학기술출연기관법 제10조 ①연구기관은 연구와 경영에서 독립성과 자율성이 보장된다’는 조항은 ‘그림의 떡’일 뿐이다.

어느 선진국도 이렇게 하지는 않는다. 연구기관장은 미국에서는 역량껏 하는 분위기이고, 독일에서는 거의 종신직으로 20년 가까이 재직하기도 한다. 일본만 해도 통상 5년이고 연임하면 10년이다. 대학 총장도 미국·유럽의 유수 대학에서는 10년 정도 하는 게 보통이다. 하버드대, 스탠퍼드대에는 20년 넘게 한 총장도 있다. 우리는 뭘 믿고 원장·총장을 파리 목숨 취급하는지 모르겠다.

‘과학의 정치화’도 선을 넘었다. “문재인 정부의 에너지 전환이란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원자력연구원의 정체성과 원자력 기술의 가치에 대해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중도 사퇴한 하재주 한국원자력연구원장의 이임사 중) ‘탈(脫)원전’과 연구기관장 숙청은 이념에 의해 과학이 억압당하거나 조작되는 ‘리센코이즘’을 방불케 한다.

혁신성장을 말하는 문재인 대통령은 과학계가 쑥대밭이 되고 있는 현실을 제대로 보고받고 있는지 의문이다. 대통령은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에서 “우리나라 R&D가 ‘고비용·저효율’이라는 비판이 많다”고 했지만, 정부가 지금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보라. 감사를 동원해 연구기관장을 자르고, 연구 자율성을 죽이고, 과학을 정치화하는 환경에서 연구 생산성이 높아질 리 없다. 기업인에 이어 과학자마저 범죄자로 내몰면 혁신성장도 끝이다.

홍성주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전략기획단장은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거버넌스를 4개 층위로 나눈다. 대통령·감사원·국회 등이 제1층위, 정부 부처들이 제2층위, 평가·관리기관들이 제3층위, 출연연구소·대학 등이 제4층위에 해당한다. 정부 R&D 예산이 20조원을 넘어섰다지만 그럴수록 힘이 더욱 세지는 곳은 제1·2·3층위다.

위에서는 명령이 쏟아지고 보고할 곳은 더 많아진다. 이러니 제4층위의 연구 자율성이나 연구 몰입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는 주장이다. 문재인 정부가 바라는 게 ‘정권을 위한 과학’인가, ‘국가를 위한 과학’인가. 국가를 생각한다면 숙청 대상은 제4층위 과학자들이 아니라, 제1·2·3층위 무소불위 권력집단의 자의적인 ‘규제’와 끝이 없는 ‘간섭’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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