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 미카일 아르노포트(1896~1979)의 ‘도시생활’. 미국 샌프란시스코 코이트타워 벽화. 1931년 작.
빅토 미카일 아르노포트(1896~1979)의 ‘도시생활’. 미국 샌프란시스코 코이트타워 벽화. 1931년 작.
현대인의 삶을 지배하는 괴물은 무료함이다. 우리는 ‘안전’이라는 무료함을 즐기기 위해 문명과 문화를 개척했다. 우리는 오감을 더욱 더 흥분시키는 외적인 자극을 지속적으로 요구한다. 결국 마취주사를 잔뜩 맞은 환자처럼 일상이 무감각해져 더욱 더 자극적인 무엇인가를 찾아 인공지능(AI)을 만들게 됐다.

그러나 인류역사에서 무료함은 최근 현상이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새벽부터 저녁까지 남녀 모두 집터와 일터에서 노동했다.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제2차 산업혁명은 노동의 분화를 통해 인류에게 ‘여가’를 선물했다. 인류는 처음으로 육체적인 노동으로부터 벗어나 자유 시간을 즐기기 시작한다. 인류는 더 이상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적자생존’의 야만적인 삶을 살 필요가 없다.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자유 시간을 가진다. 우리는 환경이나 외부의 혹독한 환경으로부터 ‘탈출하는 자유’에는 익숙하지만, 인간답고 의미가 있는 ‘적극적이며 주도적인 삶을 위한 자유’에는 서투르다. 그런 자유를 고민하고 추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무료함

우리는 대부분 중독을 조장하는 순응에 만족하고 안주한다. 여가와 노동은 동전의 양면이자 필요충분조건들로, 여가를 통해 노동이 항상 새롭게 변신한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 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높다란 담을 쌓았다. 우리는 자유로운 시간을 대개는 TV를 보거나 손 안의 TV인 스마트폰을 쳐다보면서 소일한다. 굳이 알지 않아도 되는 타인의 물건이나 타인의 일상을 탐닉한다. 혹은 카페에 앉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연예인 이야기로 몇 시간을 보낸다. 심지어 높은 산 정상에 올라서는 스마트폰을 꺼내 정상 표지석 앞에서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셀카’를 찍는다.

우리에게 어제 한 일들을 오늘 반복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무대에 들어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아무것도 열망하지 못하고 아무도 모르게 그 무대에서 사라진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말한 “부질없다. 부질없다. 인생의 모든 것이 부질없다”라는 고백이 인생의 핵심인가? 현대인들은 정체된 호수의 녹조(綠藻)처럼 번식하고 있는 무료함과 수동성, 그리고 침체라는 정신병을 앓고 있다.

의지(意志)

우리 대부분은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쾌락을 즐기는 인생을 추구하고 만족한다. 매순간 다양한 쾌락을 최대한 즐기고 고통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삶을 성공이라고 착각한다. 다른 사람들이 반복해온 것들을 흉내 낼 때, 우리는 안전하다고 느낀다. 인간 누구에게나 진정으로 독창적이며 어떤 인간도 시도해본 적이 없는 것을 실행해 옮길 수 있는, 인간이라는 동물에게만 부여된 천재성이 있다. 바로 ‘의지(意志)’다. 의지는 단순한 바람을 넘어서서 그 결과를 자신의 삶의 중요한 일부로 만들겠다는 결심이다.

19세기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 세계》(1818년)라는 책에서 인간이 소유한 의지를 은이나 금보다 소중한 가치로 평가한다. “만일 세상에 가치라는 게 있어, 아둔하고 교육을 받지 않은 대중도 은이나 금보다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삶이라는 어둠을 침투하는 한 줄기 빛이다.” 쇼펜하우어는 남들이 하는 짓을 흉내만 내는 대중은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신비하거나 어렵게 보지 않고, 당연한 것들로만 수용한다고 판단한다. 시공간 안에 살면서 인과를 통해 진행되는 사건들은 인간 자신의 의지와 의지가 표현된 표상의 반영일 뿐이다.

힌두교, 특히 《우파니샤드》에 영향을 받은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추구하려는 외부의 목적은 자기 의지의 투사라고 주장한다. 《우파니샤드》의 산스크리트어 문장을 빌리자면 ‘타트 트밤 아시(tat tvam asi)’, 즉 ‘네가 (바로) 그것이다’라는 명제다. 자신에게 고유한 의지를 발견해 키우지 못한 채 아버지라는 권위에 눌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비극적인 인물이 바로 《안티고네》에 등장하는 크레온의 아들이자, 안티고네의 연인인 하이몬이다.

반전

테베 원로들로 구성된 합창대는 장님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전하는 테베 왕가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은 혼돈의 신이자 재생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불러 테베를 파괴하지 말고 살려 달라고 애원한다. 디오니소스를 위한 테베 시민들의 의례는 점점 무서운 병에 걸린 테베를 하늘에서 불타고 있는 별들로 정화하려는 심판으로 변한다.

《안티고네》에 여섯 번째로 등장하는 이야기(1115~1256행)는 이전까지 진행된 이야기를 전복시키는 ‘반전(反轉)’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비극의 내용과 구성을 다룬 《시학》에서 비극 주인공의 운명, 특히 혈연으로 복잡하게 얽힌 진실을 마주해 그 실상을 발견하는 ‘깨달음’(그리스어 ‘아나그로리시스’)을 통해 사건이 걷잡을 수 없게 전개되는 과정을 ‘반전’(그리스어 ‘페리페테이아’)으로 설명했다. 테베에서 오염을 제거하려는 디오니소스 찬양이 끔찍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전령의 소식으로 바뀐다. 안티고네가 오빠를 매장하려는 행위가 ‘오염’이 아니라 남들의 말을 경청하지 않으려는 크레온의 아둔함이 ‘오염’의 원인이라는 소식이다. 전령은 하이몬과 안티고네의 비극적인 최후를 원로원들에게 전달한다. 크레온의 부인이자 하이몬의 어머니인 에우리디케에게도 아들에 대한 비극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전령은 이렇게 반전 드라마를 시작한다. “카드모스와 암피온의 궁전 주위에 사시는 여러분. 인간의 어떤 단계도 정해져 있다고 찬양하거나 비난하지 않겠습니다. 운명은 하루아침에 행복한 사람이나 불행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넘어뜨리기도 합니다. 인간에게 정해진 질서에 관해 예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1115~1160행)

카드모스는 테베의 창건자이고 암피온은 피리를 불어 산사태를 일으켜 테베 성벽을 쌓은 자다. 소포클레스는 이 문장에서 ‘운명’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튀케(tuche)’를 네 번씩이나 반복하면서 인생의 불확실성을 한탄한다. 전령은 이전에는 부와 권력, 그리고 자식을 가진 크레온을 부러워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인간에겐 누구나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삶을 지탱해 주는 ‘즐거움’(그리스어 ‘헤도네’)이 있다. 인간이 그 즐거움을 잃어버린다면 그는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다.

하이몬의 자살

합창대 대장은 전령의 불길한 이야기를 듣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묻는다. 그러자 전령은 “하이몬이 죽었습니다. 그의 피를 자신의 손에 의해 흘렸습니다.”(1175행) 이 모호한 문장은 그리스 원문을 통해 좀 더 분명한 해석이 가능하다. ‘자신의 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아우토케일(autokheir)’은 ‘자신의 손으로’ 혹은 ‘자신과 가까운 친지의 손으로’로 해석할 수 있다. 하이몬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그 책임은 그의 아버지 크레온에게 있다는 복선을 전달한다. ‘피를 흘렸다’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하이마세타이(haimassetai)’는 하이몬의 이름과 비슷하다. ‘하이몬’은 ‘피로 물든’이란 의미로 그의 비극적인 운명을 암시한다. 하이몬은 아버지가 안티고네를 서서히 죽어가도록 방치한 행위에 화가 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순간에 하이몬의 어머니 에우리디케가 무대에 등장해 말한다. “도성에 사시는 모든 시민 여러분. 나는 팔라스 여신(아테나)에게 기도드리고 간청하려고 문밖으로 나오다 여러분의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놀란 나머지 뒤로 넘어져 하녀들의 팔에 안겼고 정신을 잃어버렸어요. 어떤 소식인지 다시 한 번 말해주세요.”(1183~1190행) 전령은 하이몬과 안티고네의 죽음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리스 비극은 무대 위에서 폭력적인 장면을 거의 올리지 않는다. 전령의 말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시작한 음유시인의 구전 전통이 계승된 것이다.

전령은 크레온과 함께 들판 끝에서 개 떼에게 찢긴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찾아내고는 간단히 장례를 치른다. 그들은 안티고네가 감금돼 있는 무덤 안에서 비명소리를 듣는다. 그들은 무덤에 들어가 고운 리넨 옷을 찢어 올가미를 만들어 목매달아 죽은 안티고네와 그녀를 두 팔로 끌어안고 쓰러진 하이몬을 발견한다.

크레온은 하이몬을 보고 꾸짖는다. “불쌍한 녀석, 무슨 짓이냐? 이게 무슨 미친 짓이냐? 대체 무슨 재앙이 너를 이렇게 망쳐놓았느냐?”(1228~1230행) 하이몬은 아버지 크레온을 무섭게 노려보더니 그의 얼굴에 침을 뱉고는 들고 있는 칼로 그를 해치려 하지만 실패한다. 그런 후 하이몬은 지체 없이 칼을 자신의 옆구리에 밀어 넣고, 축 늘어진 팔로 안티고네를 끌어안고 숨을 거둔다.

남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 크레온의 아둔함, 아들의 죽음 불렀다
전령은 안티고네와 하이몬의 죽음을 보고는 외친다. “인간에게는 ‘무의지(無意志)’가 가장 큰 재앙이다.”(1242~1243행) ‘무의지’라고 번역한 그리스어는 ‘아불리아(aboulia)’다. 이 단어는 ‘경솔함, 생각이 모자람, 우유부단’으로 흔히 번역된다. 아불리아는 ‘의지, 결정’ 혹은 ‘고대 그리스 500명으로 구성된 민회를 통한 숙고’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불레(boule)’에 ‘부재’를 의미하는 접두사 ‘아(a)’가 붙어 형성된 단어다. 이 문장을 테베의 왕 크레온에게 적용하자면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독재를 하는 크레온의 독선인 무의지가 테베의 재앙이다. 혹은 우유부단하고 아버지라는 권위에 눌려 연인 안티고네를 죽음으로 내몬 하이몬의 무의지가 비극을 초래했다. 자신의 삶을 위해 숙고하지 않는 삶, 그 숙고를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삶이 재앙이다.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